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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민 Oct 30. 2022

18.



“저거다.”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엔 강가에 나룻배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배까지 스무 걸음 남짓이었다. 썩 튼튼해 보이는 배는 아니었지만 오늘처럼 풍랑이 없는 잔잔한 강을 건너기에 큰 무리는 없으리라고 해단은 생각했다. 

“아마 배에 올라타면 먼저 도착한 다른 사람들도 있을 기래. 축시의 중간, 기러니까 새벽 두 시에 출발할 기라. 지금이 한 시 오십 분이니 타고 있으면 곧 출발할 기래. 그라도 혹시 모르니까 큰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들어가자우. 근데 이쯤이면 사람들 말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와 아무 소리도…” 

“누님, 뒤따라 오시라요.” 명호는 해단의 귓가에 속삭이고는 행여 해단에게 잡힐 세라 앞서서 뛰어갔다. 서둘러 해단이 뻗은 손가락 끝에 명호의 옷자락이 스쳐 닿았다가 멀어져 갔다. 


탕. 

명호가 갑판에 올라선 순간 총성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서 있던 명호의 몸이 무너져 내리듯 뒤로 고꾸라지는 걸 해단은 명호로부터 다섯 걸음 뒤에서 봤다. 해단은 숨을 짧게 들이켠 다음 참았다. 삐이- 해단의 왼쪽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꿈인가. 아직 꿈 속인가. 그래, 아까 넘어져 아래로 굴러 떨어져 기절해 있는 그 상태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일 거다. 이곳까지 걸어오는 길이 그토록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던 건, 꿈이라서, 꿈 속이라서 가능했던 걸 거다. 그렇지 않고선 하늘이 내게 이럴 리가 없지 않은가. 명호, 우리 명호마저 데려가실 리는 없다. 꿈일 거다. 꿈. 아니, 꿈이어야 한다. 


“그만, 해단. 리해단. 그만!!” 복면 쓴 사내가 해단의 손을 붙잡았다. 

해단의 왼손바닥도 왼쪽 뺨도 벌겋게 부어 있었다. 

“아재, 아픔네다. 여기 뺨이 아픔네다. 아프면 아니 되는데, 이기 꿈이어야 하는데 여기 볼이 아픔네다.” 

“정신, 잡으라!” 한 손으로 해단의 양 손목을 부여잡으며 그가 말했다. “현실이다. 다 현실이라우.” 

“다른 놈들도 있을기다! 다 잡아 죽치라우!” 배 안에서 누군가 외쳤다. 달이 구름에 가리웠다. 

“잘 안 보임네다!” 배 안에서 인민군으로 보이는 병사 한 명이 뛰쳐나와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샅샅이 뒤지라우! 단 한 명도 남으로 아니 살아 가게 하라우!” 다시 안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단아, 니라도 살아야 한다.” 그는 해단을 옆의 풀무더기 뒤로 끌고 가 몸을 숨겼다.

“싫슴네다. 내래 여기 남아서 저 아색히들 없애고, 이래 만든 작자들 다 잡아 족칠기라우.”

“일단, 남으로 가래이. 가서 생각하라우. 여기 살아 있어 봤자 반란 분자 신세를 못 면할 기래. 눈이나 손 잃는 걸로 끝나지 않아야. 기라고 여기선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지 않간. 아니, 여기 기억은 싹 지워 삐리라. 일단 살라우. 부디, 살라우. 일단 산 다음에 생각하라우. 니 헤염(^헤엄)칠 줄 아나. 저기 남은 자식들은 내래 맡을 테니, 강물을 이대로 쭉 가로질러 건너 가라우. 기가 남쪽이래.” 그러더니 그는 쓰고 있던 복면을 벗고 거기에 목걸이와 작은 병 하나를 집어넣었다. “이기 내랑 너거 가족이랑 같이 찍은 사진이 담긴 목걸이라. 그라고 정말 만에 하나 잡히게 되믄 이걸 무라. 먹자마자 바로 즉사하는 독약이라. 남으로 가다가 잡혀서 북송된 자들은 살아 있지마네 산 사람도 아닌 취급을 당한다.” 그리고선 꽉 동여 매어 주머니에서 꺼낸 실에 끼워 매듭을 지은 다음, 해단의 한쪽 발에 끼워주었다. “단아, 꼭 살라우.” 그가 해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해단은 처음으로 그의 눈동자를 봤다. 구름에 가리어 달빛도 없는데, 마음이 시렸다. 

“어딨나! 이 종간나 색히들.” 풀숲 너머 저편에서 인민군 병사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가 허리춤에서 꺼낸 칼을 쥐어 잡고 풀숲 사이로 뚫고 가려는 찰나, 해단이 그의 소매 깃을 붙잡았다. 

“아재요, 이름.” 해단이 물었다. 

“저 놈들 잡고 여기 정리하고 내도 꼭 살아서 남으로 갈기다. 이름은 그때 들으라우. 기러니까, 꼭 살아 있으라우. 내도 꼭 살기래. 나중에 보재. 건강히 있으라우.” 자신의 소매깃을 붙잡은 해단의 손을 꼭 잡아주며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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