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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민 Oct 30. 2022

23.



“그리고 이서는… 죽었어. 군대에서 중대장한테 구타당하는 훈련병을 구하려 막아섰다가, 그때부터 주기적으로 성폭행을 당했어. 일 년 동안. 나는 그때 해외에 파견 근무를 나가 있었어. 전혀 몰랐어.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었을까, 나는… 그러다가 이서는 임신을 하게 되었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아이를. 낙태를 하려고 했는데, 국군 병원에서는 낙태법이다 뭐다 하며 시끄럽다고 괜히 세상에 알려졌다가 골치 아파진다고 허락하지 않았어. 그래서 바깥 병원에서라도 수술하게 내보내 달라고 계속 말했는데, 군대에서 내보내 주지 않았어.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이서는 중대장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고 죽었대. 그리고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이서가 죽고 난 후 일 년이 지나서야 그 내막을 알게 되었어.” 


세하의 말을 듣고서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해단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배, 선배가 느낀 감히 글로 다 형용할 수 없을 고통과 슬픔을 저는 감히 다 알지 못하지만, 듣는 저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선배는 오죽하실까요… 저는 감히 바라기를, 선배가 선배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다면, 제가 뭐라고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싶긴 하지만,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선배가 선배를 아프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선배께 부탁드리지만 사실 저도 아직 그런 게 잘 안 돼요. 어머니와 동생을 지키지 못했던 제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도, 아직 너무 어렵기만 하네요. 미안해요, 선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것 같네요…”

곁에서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하가 말했다. “아니야, 고마워. 들어줘서 고맙고, 말해줘서 고마워." 


하늘이 몇 번 번쩍이더니 뒤디어 온 하늘을 가득 채울 듯한 크기의 철통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둥소리였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더니 해단과 세하의 머리 위로 빗방울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얇은 빗방울들은 이내 굵은 빗방울로, 띄엄띄엄 내리던 비는 어느새 틈새 없이 빼곡히 내리고 있었다. 세하는 멍하니 비를 맞다가 옆에서 같이 비를 맞고 있는 해단을 바라봤다. “안 들어가? 나야 비 맞는 거 좋아해서 이러고 있는다지만…”

해단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비 맞는 거 좋아해요. 모든 비가 그런 건 아니지만, 이따금 어떤 비는 꼭 신이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아서, 잘하고 있다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그런 비들 맞는 건 좋아해요. 지금 이 비가 그런 비인 것 같기도 하구요.” 눈을 감은 채로 해단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비를 맞았다.

문득 해단에게 무언가 말하려다가 세하는 말을 멈췄다. 해단의 말에,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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