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날숨

명징한 사실,

사랑.

by 허수민



이름도 호명되기에 의의가 있다는 것을, 내 이름 앞에서 새삼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깨달았다.


나에 대해서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나조차 제대로 아는 바가 없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 존재해 있지만 정작 그 어디에도 나는 존재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 애초에 이 세상에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라지고 싶다는 게 바람이 될 때, 실재 해 있는 게 일이 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를 글로 진술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현재를 살라고들 하지만, 정말 있을 수 있는 곳이 오직 현재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본 적이 있을까. 하루가 영겁 같으면서도 이곳에서의 생이 한 찰나라는 것이 자각되고 수긍될 때, 존재의 의의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 의의에 관해 심오하게 고민하는 듯하나, 물음 앞에서 고개 숙인 채 그 앞에 나뒹구는 돌멩이 몇 개만 툭툭 차다가 태연한 척하며 도망치는 게 아직까지의 전부이다. 이 문장에서의 포인트는 ‘아직까지’이다.


뜬금없지만 ‘아직까지’라는 단어가 어떤 면에서는, 실은 그 자체로서 굉장히 희망적이라고 여겨진다. ‘아직까지’라며 현 상태에 관한 정도를 파악한다는 것은 점이 아니라 주욱 이어져 있는 선, 그 가능성을 쥐고 살펴보아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두고 선을 가늠하는 것이, 단순히 스스로의 머리 위에 선을 그어 키를 재듯 성장의 한계를 가름 짓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향해 딛고 나설 발판의 위치를 가늠하는 것과 같달까.


내가 나를 완전히 버리고 그 가운데에 오직 상대만을 두어야, 사랑하는 것이며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순전히 나의 생각이었고, 내 선택이었다. 나를 버리겠다는 것은. 하지만 적어도 사랑만큼은 내 안에 ‘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건넸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대부분 오답이었을 때, 그 오답에 사랑하는 사람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을 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깨달음은 쌓아지며 오는 것이라 여겼는데 정신을 너머 존재가 박살 나며 붕괴되는 듯한 무너짐 틈에서 비롯되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을, 사랑하며 알아 간다.


근데 내가 나를 버리겠다 하여, 나는 진정으로 버려질 수 있는 것일까. 만일 진짜 버려졌다면, 지금 존재해 있는 나는 무엇인가. 이러한 사유가 의미 있는가 생각해보게 되면서도, 의미 없는 사유란 이 또한 가치 판단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어딘가에 있는 문장들을 그저 끌어오는 것 같기도 하다.


여튼 다시 돌아와서, 내가 나를 버렸다는 문장을 쓰다가 든 생각은 엄밀히 말해서 ‘내가 나를 묻었다’가 보다 적합한 표현이 아닐까 라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글을 쓰는 것이 마치, 나를 파내려 가며 이루어지는 작업과도 같다면 글을 쓰면서 어딘가에 묻어 둔 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글들은 발굴된 조각들 혹은 부산물의 축적이려나.


사랑함에 있어서 나를 알아가는 것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글을 써야만 하는 의의를 모르겠다며 물음표를 바늘 삼아 낚시하러 떠나겠다는 나의 도망침은 더 이상 그 어떤 순간에서라도 타당할 수가 없다.


여전히 나의 존재 의의에 대해 의문이 하나 가득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명징한 사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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