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치듯 잔잔히 - 3

3편

by 허수민


그날 이후로 우리는 매일 만났다. 학교를 마치고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집으로 힘없이 터덜터덜 지나다니던 강변 옆 언덕길은 온통 재밌고 설레는 길목이 되어있었다. 가다가 만난 곤충들이나 새로 핀 꽃들을 유심히 보고는 람에게 가서 오늘 만난 것들에 대해 시시콜콜 얘기해주는 순간들을 좋아했다.

람은 처음엔 그저 조용히 듣기만 하다가,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본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주로 돌들에 관한 얘기였다. 갖가지 물결과 무수한 시간 속을 거쳐오며 제각각의 모양으로 빚어진 모나고 둥근 돌들을 보는 게 좋다고 했다.

낮 동안의 볕을 가득 머금고 따스해진 돌도, 새벽의 냉기를 머금어 시원해진 돌도, 손에 가만가만 쥐고 있다 보면 어느새 미지근해져 있는 돌도 다 좋다고 했다. 돌이 다 똑같은 거 아닌가 하며 이따금 시큰둥하게 듣던 나도, 어느새 람이 없을 때도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들을 유심히 지켜보곤 했었다.


람은 정말 스승님처럼, 나는 정말 제자처럼 물수제비 뜨는 걸 가르쳤고 배웠다. 람은 언제나 강가 옆 풀밭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어쩐 건지 내가 학교 끝나고 아무리 빨리 뛰어 와도 람은 책가방을 지니고 있지 않은 채로 강가에 나와 있었다. 벌써 집에 두고 나온 걸까. 람은 혹시 축지법 같은 걸 쓰는 게 아닐까. 젊은 도사일지도 몰라. 물수제비를 다 배운 다음엔 나도 축지법을 가르쳐 달라고 해도 좋겠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먼저 앉아 있는 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학교에서 람을 본 적이 없었다. 마을엔 아이들이 워낙 없는 터라, 한 학교 내에 각 층별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모여 있었다. 선생님도 별로 없었고 아이들도 별로 없었기에 학교에서 람을 마주치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지만, 초등학생 당시의 나는 잠이 너무 많아서 학교에 가면 매번 졸다가 집에 갈 때 즈음되어서야 졸음에서 깨어나곤 했기 때문에, 내가 잠을 자느라 정신이 없어서 람과 못 마주치나 보다 생각했다.


람 옆에 앉아 내가 학교 매점에서 사 온 군것질 거리들을 풀어놓고 람과 나눠 먹고는 해가 넘어가기 전까지 열심히 돌을 던졌다. 그리고 람은 헤어질 때에 이따금 홍시를 주곤 했다. 집 앞마당에서 주웠다며, 우리 가족이 세 명이란 걸 알게 된 후로부턴 꼭 서너 개씩 들려 주었다. 나는 그걸 가방에 고이 넣어 집에 가져가서 부모님과 함께 앉아 밥 숟가락으로 홍시를 떠먹곤 했다.


람은 좋은 스승님이었다. 아직 할 줄 아는 거라곤 강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뿐이던 나는 패기 좋게도 단숨에 열 번을 던지고 싶어서 안달이 나곤 했다. 두세 번도 더 못 가서 물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돌을 보며 발을 동동거리곤 하는 내게 어떻게 한 걸음에 열 걸음을 가려 하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람은 내가 던진 평소에 비해 더 많이 뛰어가다가 물속으로 돌이 잠겨 버릴 때면 나보다 더 안타까워하고 속상해 했다.

내가 한 단계씩 성장할 때마다 저가 더 좋아하며 잘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내가 낙심하고 있을 때면 어깨를 한 번 토닥이곤 가끔 물살의 속도나, 돌멩이의 특성에 따라 기복이 있을 수 있다며, 이런 때가 있으면 저런 때도 있는 거라고, 하지만 계속 도전하는 이상 분명 점점 더 나아질 거라며 내 손에 돌멩이를 쥐어 주었다.

람이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평평하고 얇으며 내 손에 딱 들어오는 크기의 돌멩이는, 람이 그 사이에 물수제비 뜨기에 좋은 걸로 열심히 찾아낸 거라는 걸.


물수제비. 그게 뭐라고 우린 그렇게 열심이었을까. 누가 그렇게 시킨 것도 아닌데 제 풀에 지쳐서 잔디밭 위에 널브러질 때면, 돌을 던지느라 너덜너덜 해진 것만 같은 팔을 들어 하늘을 향해 펼쳐 보며 괜시리 뿌듯해하곤 했다. 팔을 너무 썼는지 집에 돌아가 식사를 할 때면, 어김없이 한 두 번씩은 식탁보 위에 반찬을 놓쳐서 적당히 좀 하고 오란 핀잔을 들어도, 그 혼이 꼭 훈장 같이 여겨지곤 했다.



여전히 매일 같이 강가에 나가다가, 가을이 지나고 겨울의 중순을 지나갈 무렵, 꽤나 독한 독감에 걸려서 삼일 내내 집에서만 끙끙 알았던 날이 있었다. 열이 내리고 외출 금지령이 풀리자마자 곧바로 강가에 나갔는데, 람은 그곳에 없었다. 그날 이후 다시 매일같이 강으로 나섰지만, 람을 볼 수는 없었다. 그땐 집집마다 전화기가 이제 막 보급되던 시절이라, 따로 연락할 방도도 없었다.


왜 그동안 어디에 사는지 정확히 물어보지 않았을까. 집이 어디냐고 딱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람은 강 건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즈음에 있어.”라고 말했었다. 람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강 건너 어디 쪽에 있는지 물으려 람을 바라봤는데, 순간이었지만 람의 얼굴에 서글픔이 잔뜩 배어 있어서 그렇구나 하고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 이런 부분은 여전히 어렵다. 사람들의 슬픈 표정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이 슬퍼하는 사람을 위한 일인지 몰라 혼자 허둥거리다가 매번 늦곤 한다.


후로 나는 혼자 돌을 던지며 스스로를 자주 채근하곤 했다. 그렇게 혼자 돌을 던진 지 일주일, 보름, 한 달, 세 달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어느새 여덟 번 연속으로 물수제비를 뜰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잘 던지는 날은 열 번까지 건너가기도 했다. 아슬아슬하게 열 번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내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물수제비로 돌멩이를 강 반대편 물가로 보내는 것이었다. 열 번에서 딱 다섯 번만 더 넘어가면 될 것 같은데, 좀처럼 해내기 쉽지 않았다.



독감이 나은 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강가에 나가 물수제비 뜨기 대회를 준비하듯 강행군 연습을 했다. 한참을 연습하다가 멈춰야 했던 날이 있었다. 축제날이었다. 그 해에도 어김없이 축제가 열렸고, 우리 마을 사람들은 물론, 주위의 다른 지역 사람들도 모여들어 강가는 인파로 복작북작거렸다. 사람들의 조곤조곤한 말소리와 잔잔한 풀벌레 소리가 함께 맞물려 강물 위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물수제비 연습을 하기 위해 몇 번 강에 돌멩이를 던졌다가 사람 많은 곳에서는 하지 말라는 부모님의 꾸지람을 들었기에, 심통이 난 나는 비탈길의 잔디밭에 앉아 삐툴하게 턱을 괴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오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지 뒷목이 뻐근해져 왔다. 잠시 고개를 가누어 보려고 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해가 저물고 어두워져 있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은람이었다.



=> 4편에서 계속



- 함께 들으면 좋을 곡 : 물결처럼 잔잔히(serenely like waves) https://soundcloud.com/aizjt4pbopgf/serenely-like-a-wave?si=79e2c93ee7e14a3882e44940880cc4b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