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릭스 leex Nov 25. 2022

정신차려 보니 연말, 변한 건 없니?

나는 왜 변하지 않는가?

는 왜 변하지 않는가

연말이 코앞이다. 11월도 고작 한주 남았다. 조금 이르지만 올해를 정리해보자면 '전년에 비해 한 발 더 전진' 정도 될까? 고작 한 발인가 싶겠지만 확실히 변했다는 게 어딘가.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책을 100여 권 더 읽었으며 A4지로 1000여 페이지를 썼다. 그중 일부는 두 번째 책이 됐다. 폭망 수준이던 첫 책에 비해 시장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출간 2개월이 돼가는 현재, 6주째 각 판매채널 베스트딱지가 붙어있고(물론 종합 베스트셀러와는 거리가 멀다) 언론사 인터뷰도 했고 방송사 북토크 영상도 찍었으며 대기업 워크샵도 진행했다. 모 교육청 특강도 앞두고 있다. 약 3개월 전 시작한 브런치도 구독자 0명에서 450명을 넘었다.


이전에 비해 좋은 방향으로 변한 것이냐? 묻는다면 글쎄, 그건 아직 두고 봐야 한다. 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졌지만 월급을 대체할 만큼 안정적으로 먹고사는 수준이 되기엔 턱없고 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므로... 어느 순간 '이쯤이면 됐다' 싶은 완결의 순간이 찾아오겠지만 그마저도 한시적이다. 변화는 과정 그 자체이지 결과가 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45세 이전의 나는 달랐다. 매년 나이 한 살을 더 먹고 주름과 흰머리가 느는 것 외에는 확실한 변화가 없었으니 말이다. 여기저기서 변화를 외쳐댔지만 요란한 구호에 비해 왜 그래야 하는지 스스로 납득하는 사람 또한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대로 살다가는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삶이 되고 말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함이 있었을 뿐, 당장 변하지 않아도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는 직장인이라는 현실에 안주했다. 발등에 불 떨어지지 않았던 거다. 다만 50대 60대에 이르러 회사라는 배경을 벗게 된다면 내 이름값 만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라는 본질적 질문은 끊이지 않았다.


막연한 불안감과 미래에 대한 고민은 '뭐라도 해야 된다'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연말이 되면 내년에는 달리 살아야지 마음을 먹기도 하고 영어 학원을 다니겠다는 계획도 세우고 내 직무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찾게 했다. 급기야 대학원 진학이라는 나름 큰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결과론이지만, 이런 노력들은 아무리 잘 쳐줘도 자기만족에 불과했다. 이쯤 했으면 뭐라도 한 거니까 된 거야.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합리화하는데 익숙해졌다. 이를테면 고통을 일시적으로 없애주는 진통제 같은 역할이었으리라. 본질적 변화는 하나도 없는데 내성이라도 생긴 듯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까지 가버렸다.


수천만 원을 들여 대학원을 마치고서야 내성이 깨어져나갔다. 일명 현타가 왔다. 물론 대학원 진학을 통해 얻은 것이 적지 않았지만 근본적으로 나라는 존재를 변화시키기에 턱없었다. 기대가 컸던 탓일 수도 있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탓이기도 하다. 이런 노력들이 오갈 데 없는 자기만족, 아니 자기기만임을 절감하게 되었는데 이 깨달음이 어쩌면 가장 큰 소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변하고 싶다는 의지가 부족한 탓일까? 아니면 노오력이 부족해서였을까? 뭔가 계속 하긴 하는데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직장을 다니면서 나라는 존재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무엇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정말 가능하긴 한 걸까?


"만나는 사람, 쓰는 시간, 사는 곳(일하는 공간) 세 가지를 바꾸지 않으면 변화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오마에 겐이치의 저서 [난문쾌답]에서 어렵게 그 답을 찾았다.


사람, 시간, 공간은 현재의 내가 연결된 모든 것이다. 매일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하며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동안 익숙함과 편안함을 가장한 매너리즘에 묶인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잠드는 일상에 루틴을 깨는 스케쥴이 파고들 틈은 그다지 많지 않다. 매일 같은 곳에서 같은 업무를 반복하는 일상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다. 


"진정한 변화는 해동-혼란-재동결의 과정으로 일어난다."

심리학자 쿠르트 레빈 또한 거들었다. 깨달음에 쐐기를 박아주었다.


나를, 혹은 나와 연결된 주변을 그대로 두고 변화를 꾀한다면 그저 +∝, added 가 될 뿐이다. 왜 회사를 다니면서 시도했던 변화의 노력들이 그토록 버거웠는지, 고작 작심삼일에 그쳤는지 알게 됐다. 머무는 공간, 만나는 사람, 쓰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새로운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현재 손에 쥔 것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지겠다며 되도 않은 과욕을 부렸던 꼴이다. 


변화는 무엇을 어떻게 변할까? 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내려놓을까? 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를 체감할 기회는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45세에 덜컥 결정한 퇴사. 회사를 그만두었으니 만나는 사람, 쓰는 시간, 일하는 장소가 한꺼번에 달라지지 않겠는가.


소설가 김연수는 이를 '돌아갈 다리가 불타버렸다'라고 표현했는데, 아갈 곳이 없어진 마흔다섯의 백수는 지금까지 자신을 유지해온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해체시켰다. 아니 해체시킬 수밖에 없었다.


정기적인 출퇴근과 주 3회는 거뜬하던 술자리가 사라졌다. 늘 끊이지 않던 동료들과의 연락이 끊어졌다. 거대 항성의 폭발 후 생긴 블랙홀처럼 시간과 공간과 역할의 공백이 하루를 잠식했다. 스스로의 패턴을 만들어 하루를 채우지 않으면 우주 미아가 된 듯 무질서를 유영해야 했다.


출근 시간과 다를 바 없는 시간에 일어나 하루 종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과거의 궤적을 더듬어 실패와 성공의 경험을 끄집어냈다. 그렇게 나는 직장인이라는 껍질을 완전히 벗고 조직과 사람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글이라는 하드웨어에 담는 스토리텔러로 변했다. 아주 초보적이고 아마추어틱할망정 그렇게 부를 있는 여지를 일단 만들었다.


그렇다면 변화를 위해서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란 말이냐? 


마음 같아선 "그렇다" 라며 자신 있게 외치고 싶지만 어디 현실이 그런가. 잘 다니던 회사를 당장 그만두고 환경과 시간과 만나는 사람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반적이진 않지만 분명 회사를 다니면서도 스스로 만족할만한 변화를 만들어낸 사람도 있으리라. 이런저런 이유로 '나도 했으니 너도 해봐' 라기엔 무책임하다. 리스크가 크다.  


그러나 그 현실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들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스물스물 내 의식을 잠식하고 있다면, 이미 마흔 언저리에 도착해 있다면 무언가 이전과는 명백히 다른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옳다. 


퇴사가 비현실적이라면 그에 준하는 충격을 스스로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변화란 지독하게 단단해진 기존의 나를 조금씩 허물어 빈자리를 내고 그 안에 새로운 무언가를 채워 넣는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완전히 나를 해체해 액체 상태로 만든 후 원하는 모양을 스스로 그려 재동결 시켜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변화는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 나를 꾸며주는 포장지를 모을 수는 있어도 본질을 완전히 뒤바꾸는 진정한 변화는 단언컨대 어렵다. 해체의 과정에는 아픔과 혼돈이 따른다. 이를 오롯이 감내해야 하는 주체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하물며 현재의 것을 하나도 놓지 않고 새로운 무언가를 더하겠다는 다짐은 변화 의지가 아니라 허튼 욕망이다. 변화는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부터 버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시작 외에는 모두 가짜다.

작가의 이전글 이봐, 바닥까지 내려가 봤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