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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Aug 15. 2023

광복절에 얻은 보물 '작은 땅의 야수들'

600페이지가 넘는 장편을 3일 만에 완독 했다.

특별히 광복절을 의식하고 고른 책은 아닌데, 공교롭게도 광복절 당일에 완독 하게 됐으니 기막힌 우연 아닌가.


한국계 미국인 작가 김주혜가 쓴 일제치하 조선의 이야기. 그 역사적 소용돌이에 얽힌 각양각색 인물들의 삶에 미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가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는 평이 눈길을 끈다. 요즘이야 워낙 전 세계적으로 한류 열풍이 대단한 탓에 K 콘셉의 주목이 그다지 놀라울 일은 아니지만, 100여 년 전 강대국들의 제국주의 광풍 속 식민지가 된 동방의 작은 국가 이야기에 이런 관심이 쏟아질 줄은 작가 본인도 몰랐다고 하니, 이쯤 되면 마틴 스콜세이지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주인공은 함경도 출신 사냥꾼의 아들 남정호와 생활고에 시달리다 기생이 되기로 한 옥희 두 사람이다. 이들은 1918년 경성에서 우연히 조우하는데, 기생 견습생으로 퍼레이드에 나온 옥희를 보고 정호는 첫눈에 반한다. 옥희는 정호의 삶의 의미가 되고 옥희는 순수하게 정호를 친구로 의지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정호는 거지왕초에서 종로바닥 상인들을 등쳐 먹는 깡패로 공산주의자로 독립투사로 거듭나고 옥희는 기생에서 경성 최고의 배우로 유명인사로 거듭난다.


그 두 사람을 둘러싼 수많은 인물들의 삶이 일제치하 경성과 평양이라는 공간적 배경과 얽히며 이야기는 현실성과 입체성을 얻는다. 마치 그 시대를 내가 살고 있는 듯 구체적이고 세밀한 묘사와 인물 간의 스토리는 이야기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1919년 일어난 역사적 사건인 3.1 운동을 옥희와 정호라는 개인 인물의 시점에서 지켜보는 일은 마치 내가 그 시절 인물이 되어 그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일으키게 한다. 옥희와 그의 둘도 없는 친구 연화, 그리고 월향이라는 어린 기생들의 보호자이자 당대의 이름 높은 기생이었던 단이가 동료기생들과 시위면에 나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장면 신분과 성별, 늙음과 젊음을 초월해 대의를 향한 순수성의 힘이 얼마나 장엄한지를 새삼 깨닫게 해 준다.


물론 소설은 역사의 밝은 면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시대적 비극을 함께 는다. 태극기를 손에 들고 평화적인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받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마저 짓밟히는 무수한 민초들, 대지주의 후손이자 돈 많은 사업가로 일제에 부역하는 것도 모자라 민족주의, 독립에 대한 여망 같은 대의에 냉소하는 김성수 같은 인물, 옥희가 평생 사랑했지만 출신성분을 빌미로 옥희의 사랑을 외면하고 김성수와 다를 바 없는 성공을 좇으며 시대의 흐름에서 기회를 잡아 대기업 회장으로 성공하는 김한철 같은 인물, 김성수와 같은 지주계급으로 태어났지만 남다른 민족정신과 민중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평생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끝내 그 많은 재산을 잃고 정권에 의해 비극적 삶을 맞이한 이명보 같은 인물, 그를 스승으로 존경하며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끝내 공산주의자의 누명을 쓰고 국가에 의해 사법 살인을 당한 정호와 같은 인물들의 면면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역사적 공과,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빈부의 격차 등 병폐의 원인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아 못내 씁쓸하다.


옥희와 정호에게도 꿈같은 시절이 있었다. 옥희는 아이에서 여인으로 변모하며 숨겨졌던 매력이 폭발해 당대 최고의 배우이자 연예인이 된다. 영화에도 출연하고 유명인사가 되어 경성시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엄청난 부까지 따라오며 남부러울 것 없는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의 단짝 친구 연화 역시 가수로서 최고의 명성을 떨치며 둘은 짧지만 강렬한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의 삶에 대한 묘사는 여기가 현대의 서울인지 1910년대의 경성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생동감넘치고 아무런 걱정 없이 삶을 즐기는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은 멋들어진 양장을 걸치고 자유연애를 하며 까페에서 꼬냑을 마시고 커피를 주문하고 화려한 쇼를 보며 삶을 만끽한다. 


그즈음 인력거꾼의 신분으로 옥희와 처음만난 한철은 야망은 있지만 그래도 순수함을 잃지 않은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그 시점만큼은 아무런 의도도 야망도 없이 순수하게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우고 마침내 그 사랑을 확인하며 행복한 미래를 꿈꿨을 시간이었을 것이다.


정호 역시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옥희를 짝사랑해왔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 이미 한철을 마음에 품은 옥희에게 정호는 친구 그 이상은 아니었으므로. 사냥꾼의 아들이자 우직하고 충직한 성정의 정호는 평생 목숨을 바쳐 지킬 두 사람으로 옥희와 존경하는 스승 이명보를 마음에 품는다. 그리고 그 마음은 소설 전반에 걸쳐 행동으로 증명된다. 신념, 그리고 사랑이라는 어쩌면 허망한 이상을 꿋꿋이 지켜내는 정호의 순애보는 그의 비극적 마지막과 연결되어 더 짠하다.


일제치하 지배계급이자 엘리트였던 두 일본인 야마다겐조와 이토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각각 본토 남작과 백작의 아들이자 일본군 소좌로 만나 절친이 된 두 사람의 운명은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며 명확히 갈린다. 공교롭게 야마다 겐조는 남정호의 아버지인 사냥꾼 남경수와 인연이 있다. 소설의 첫 장면인 함경도 어느 눈 내리는 산속에서 둘은 호랑이와 함께 조우한다. 서로 목숨을 구해주는 상황 속에 야마다 겐조는 남경수에게 징표를 건네주며 일본군 장교치고는 인간적 면모를 은근슬쩍 비친다.(이 인연은 수십 년이 흐른 후 남경수의 아들 남정호와 또다시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는 소설을 통해 확인하길 바란다)


소좌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이토와 달리 군에 남은 야마다는 태평양 전쟁 말미 군단장으로 진급해 최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하지만 본능적으로 일본의 패배를 직감한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소식까지 들은 야마다는 소련군과 맞닥뜨린 전투에서 궤멸적 패배를 당하고 홀로 도망쳐 어느 산속에 이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이 펑펑 내리는 깊은 산속 은신처에 나온 야마다는 야생 월귤을 따먹다 길을 잃고 쏟아지는 눈 속에 엎어져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일본군 최고위층이자 귀족의 자제에게 닥친 비극적 최후가 특수한 경우라면, 식민치하 식민지 백성들의 비극적 최후는 일상이다. 야마다의 최후를 통해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 어차피 삶과 죽음 앞에 신분 따위, 출신 따위 다 무슨 소용인가? 라는 진부한 본질적 질문과 교훈을 줄지는 몰라도 그들의 압제하에 고통받던 조선인들의 비극적 결말은 그야말로 현실이며 그 현실을 가장한 지옥으로서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옥희 역시 중년이 지난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끼니를 못 때울 정도로 고초를 겪는다. 옥희를 평생 사랑했던 정호의 도움으로 근근이 삶을 이어가지만, 한편으로 정호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큰 상처를 주며 인연의 끈이 멀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시기 경성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은 전쟁 말미에 수세에 몰린 일제의 악랄한 수탈에 탈탈 털려 굶어 죽는 사람이 넘쳐나는 그야말로 지옥의 땅으로 변모한다.


그 반면 일본인 지배계급이거나 그에 부역하며 부를 축적한 김성수, 김한철 같은 일부 인물들의 삶은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더 풍요를 누리면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과 선명히 대비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울분을 자아낸다.


그들 일부를 제외한 소설 속 인물의 최후는 모두 비극적이다. 한때 경성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아름다움의 대명사였던 단이는 매독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고, 단짝 연화는 극장 사장과 결혼했다 버림받고 아편 중독에 빠진다. 그를 평생 짝사랑했던 또 다른 주인공인 남정호와 그의 스승 이명보는 앞서 말했듯 정권의 희생양이 되어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10살의 나이에 엄마의 손을 잡고 평양의 이름난 기생집 문을 두드렸던 옥희는 이제 세상에 오롯이 홀로 남았다. 젊은 시절 화려했던 명성과 미모, 부는 이제 온데간데없다. 그의 마지막 여정은 어떻게 마무리될까?


옥희가 어렸을 적, 그를 처음 거두었던 은실은 옥희를 동백꽃에 비유했다. 동백꽃은 추운 겨울에 피어나지만 떨어질 때도 그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떨어진다던가? 옥희와 주변 인물들의 삶을 그저 인생무상이라 에두르기엔 그 그릇의 폭과 깊이가 너무 작다.


오늘 8.15일 광복절에 그 시절의 이야기를 읽어낸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나는 어떤 삶을 택하고 받아들였을까? 라는 물음은 당분간 머릿속에서 쉬이 떠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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