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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Oct 30. 2023

긋빠이, 챈들러 빙

주말,

매튜 패리의 사망소식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대학 졸업 후 사회 초년생 시절이었을 것이다

약 2년 정도 미드의 조상 격인 [프렌즈]에 빠져있던 때가 있었다


영어 공부에 좋다는 말을 듣고 어둠의 경로로 영상을 다운받아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부터 시간만 나면 프렌즈를 보는 게 일이었으니까


시즌1부터 10까지 전 시리즈를 5번 반복해서 돌려봤는데

시즌 당 30~40분 분량 20개의 에피소드인 점을 감안하면

대략 1000회, 무려 3~4만 분을 소화했던 셈이다


미쳤지...젊었고,

다만 들인 시간치고 영어 실력이 생각보다 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함정


뉴욕은커녕, 미국령이라곤 하와이에 여행으로 다녀온 게 전부지만

당시 20대 초중반의 청춘 남녀 뉴요커 6인의 이야기에 쏙 빠져

마치 내가 그 주인공이라도 되듯, 센트럴 퍼크와 그들이 살던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에 몰입하곤 했다


결정적 계기는 로스 겔러(데이빗 쉼머 분)와 레이첼 그린(제니퍼 애니스톤 분)의

러브라인 때문이었다


레이첼은 모니카(코트니 콕스 분)의 단짝 친구로

모니카는 그 로스의 친여동생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동생의 친구인

레이첼 그린을 짝사랑했지만

속시원히 고백한 번 못하고 흐지부지 멀어졌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 친구가 되고 또 연인이 되는 과정의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졌을 수가 없었더랬지


더 정확히는 극 중 로스처럼 젊은 날의 레이첼 그린을 마음속으로 짝사랑했던 모양


로스와 레이첼의 이야기에 비해

사실 챈들러 빙이라는 캐릭터는 그리 내 주목을 끌지 못했다

시즌 중후반에 접어들며 모니카와 러브라인을 만들면서 로스-레이첼 커플 못지않은

감정선을 만들어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사캐스틱 한 성격에 4차원의 개그를 구사하는

조금 묘한 캐릭터에 가까웠다


챈들러 빙, 그러니까 매튜 패리는 실제 사생활에서도 약물 중독 등 문제가 있었는데

시즌3에서는 체중이 급격히 빠진 모습으로 극 중에서도 줄담배를 피우고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약물 중독을 극복하고 10 시즌까지 이어지는 챈드럴 빙 역할을 완수해냈지만

여러모로 다른 캐릭터에 비해 불완전하고 뭔가 결핍이 있으며 주변과 잘 섞이지 못하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왠지모를 짠함 감정을 자아냈던 캐릭터이기도 했다

주류에 섞이지 못하고 아싸를 자처했던 나 자신을 이입했던 탓일까?


챈들러의 극 중 성격(실제 성격과도 연계된 것인지는 모르지만)을

가장 잘 묘사했다고 보는 에피소드는 단연코

시즌 2 Apartment noise, Mr. Heckles dies 를 꼽을 수 있다


모니카 아파트 바로 밑층에 사는 Mr. Heckel 이라는 괴짜 노인은

틈만 나면 천정을 빗자루로 쿵쿵 쳐댄다

의자에 앉았을 뿐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조차

층간 소음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위층에 올라와 시끄럽게 굴지 말라며 항의를 한다

기가 막힌 친구들과 잠옷 차림의 미스터 헤클은 한바탕 설전을 벌인다


다음날 어김없이 빗자루로 천정을 쳐대던 미스터 헤클

그러다 쿵~ 무언가 쓰러지는 커다란 소리가 나고

이내 미스터 헤클 사망 소식을 접한다


층간 소음으로 다투기는 했지만

갑작스러운 미스터 헤클의 죽음으로 놀라는 친구들

더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미스터 헤클이 친구들 앞으로 유서와 유산을 남긴 것

가진 것이라 봤자 잡동사니뿐이었지만

그래도 불편한 관계였던 자신들에게 유산을 남긴 사실에 대해

묘한 감정을 갖는다


미스터 헤클이 남긴 유산(을 가장한 잡동사니)을 치우는 과정에서

유독 챈들러는 미스터 헤클에게 감정 이입을 하기 시작한다

젊은 날의 사진첩과 편지들을 살피면서

괴팍하고, 4차원적이고, 엉뚱한 데 관심 많은

자신과 비교해 동질감을 느끼게 된 것

급기야 자신의 노년이 결국 아무도 찾는 사람 없는

미스터 헤클 처럼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진다


미스터 헤클이 집에서 미스터 헤클처럼 옷을 입고 행동하다

급기야 위층에서 층간 소음의 환청이 들려와 빗자루로 천정을 쿵쿵 치는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다


그러나 챈들러에게는 이미 가족보다 그를 더 잘 알고 신뢰하고 애정을 가진

5명의 친구들이 존재했고 그들의 끈끈한 우정에 힘입어 미스터 헤클과의

동기화에서 차츰 벗어난다


미스터 헤클이 남긴 유산(잡동사니)이 모두 치워지고

깔끔해진 그의 아파트를 홀로 바라보며

챈들러는 이렇게 말한다

"Good bye Mr. Heckle, we'll try to keep it down"


69년생, 향년 54세. 7살 차이

사느라 바빠 잠시 잊고 지냈던 동네 형의 부고를 들은 것처럼

마음이 종일 무거웠던 가을 주말, 나는 그 장면을 부러 찾아 수차례 되돌려 봤다

뭔가 소중한 것을 과거에 두고 온 것처럼 끝없이 침잠하는 감정

더 무거워지기 전에 서둘러 집업을 꿰어 입고 근처 강변으로 산책을 나간다


늦가을 높은 하늘과 온화한 햇볕, 붉게 노랗게 물들어 가는 나뭇잎들이

묵은 감정을 휘휘 쓸어내주는 듯했다


그렇게 내게 남긴 것 같았던

누군가의 유산은 어느 정도 치워졌고 깔끔해진 자리가 드러났다

불을 끄고 문을 닫기 전 그에게 말해야겠다


"Good bye 챈들러 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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