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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Dec 05. 2023

얼마나 자주 나답지 않아야 내가 아니게 되는 걸까?

참지, 마요 _내적욕구 _나다움

"너답지 않아."

종종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들려올 때면 언제부턴가 참지 못하게 됐다.

'아니, 나 다운게 뭔데?' 싶어서다.

물론 현실에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은 거의 없지만 괜히 스크린 속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나답지 않다'는 말은 전적으로 내가 주체가 되는 문장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제 3자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너답지 않다'라고 단언하는 것일까? 내 속내 깊숙이 들어갔다 온 것도 아니면서.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나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어쩌면 '나다움'이란 내 내면으로부터가 아닌 주변으로부터 만들어진, 타자가 보는 '나다움'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바람, 선생님의 기대, 옆집의 시선, 대학의 이름, 회사에서의 역할, 사회적 지위 등 주로 외적 기준에 의해 나도 모르게 만들어진 '나다움'을 내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 말이다. 그런 이유로 누군가 '너답지 않다'라고 단정 짓는 일은 '왜 내가 규정한 대로 행동하거나 사고하지 않느냐?'라고 지적하고 가르치려는 일방적 폭력에 가깝다.


이들이 보는 '너다움'은 내 내면의 진짜 '나다움'과 얼마나 일치할까? 얼마나 자주 그런 일을 하면 그런 사람이 되는 걸까? 다시, 얼마나 자주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은 나 다운 게 되는 것일까?


피를 나눈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를 제대로 모르고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하물며 완벽한 타인은 오죽할까? 그럼에도 가정, 학교, 동호회, 직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관계에서 저 자신도 제대로 모르면서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고 단정 짓는 선무당들이 여기저기 널렸다.


특히나 사람을 각각의 개성을 가진 주체로 보지 않고 부품화해 최대의 생산성을 뽑아내는 도구로만 인식해 온 천박한 자본주의 시대에 '나다움'을 드러내는 일은 일종의 일탈로 치부되기 일쑤다. 어쩌면 '남들도 다 이렇게 살아'라는 체념이 만연해지고 왜 일을 하는지 '먹고사는 문제'외에 더 높은 차원의 이유를 좀처럼 찾지 못하게 된 근본적 원인이 여기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무엇이 진짜 '나다움'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꾸역꾸역 쳐내며 황금 같은 청춘을 소모하기엔 인생이 아깝지 않은가.


'나다움'은 그 누구도 아닌 나에 의해 내 내면으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 그렇게 표면화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그 자체로 나 다운 것이 된다.




[무한도전_해님달님]편을 재밌게 본 적이 있다. 전래동화 [해님달님]을 각색해 선한 호랑이와 악한 호랑이로 나뉘어 해님(유재석) 달님(정형돈)을 지켜내고 엄마가 전해준 떡을 전달하는 미션이었는데, 멤버 중 하필 노홍철이 선한 호랑이 역을 맡게 된다.

평소 사기꾼이라는 이미지로 통했던 노홍철은 좀처럼 해님과 달님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 아무리 논리에 맞게 상황을 설명하고 진심을 담아 자신이 선한 호랑이임을 어필하려 해도, 사기꾼이라는 낙인을 떨쳐 내지 못하고 끝내 미션은 실패하고 만다.


멤버들이 만들고 스스로도 거부하지 않았던 사기꾼이라는 캐릭터가 치명적인 덫이 된 셈이다. 그저 일개 예능 프로의 게임결과로 웃고 넘기기엔 메시지가 제법 묵직했다. 한번 새겨진 각인이 이렇게 크게 작용할 줄 몰랐다며 눈물까지 글썽이며 허탈해하는 노홍철의 모습은 실제 인간관계에서 알게 모르게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너다움' 이라는 낙인의 위력을 실감케 한다.


노홍철은 몇 년 후 무도 10주년 특집 '쉼표'편에서 사기꾼 캐릭터에 얽힌 그간의 속내를 털어놓으며 눈물을 보인다. 어떤 경로든 무도라는 예능을 위해 만들어진 사기꾼 이미지가 내면의 진짜 '나 다움'과 충돌하며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을 고백한 순간, 무도 멤버들은 전원 숙연해졌다.

이 장면을 보며 예능으로 인해 일부러 만들어진 이미지조차 이럴진대 실제 관계에서 나는 내 주변사람들에게 어떤 '낙인'으로, 어떤 '너다움'으로 각인되어 있을지 궁금하면서도 내심 두려워졌다.




퇴사 후 4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비로소 내 내면으로부터 존재하는 '나다움'에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 있었다. 동시에 나를 거쳐갔던 타인들이 가졌을 '너다움'에 대한 실체도 어느 정도는 짚어낼 수 있게 됐다.


그것은 주로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분명한 가치관과 굳은 의지에 비해 지혜롭게 소통하지 못하는 '고집불통 독불장군'

말과 행동이 온전히 일치하지는 못한 '아가리 파이터'

한없이 이상적인 비전에 비해 현실에 닿는 구체적 실천방안을 내놓지는 못하는 '이상주의자'

따위


내면으로부터 찾을 수 있었던 진짜 '나다움'과 타인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너다움'은 한동안 격렬하게 충돌했다. 순전히 오해라며 자기변명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 오해를 만든 것 또한 나 자신이라는 사실 역시 깨달으며 쓰린 속을 달랠 뿐이다. 다행스러운 건 아프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뼈 때리는 진실이 변화의 계기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뭘 모르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라면 개선의 여지는 아예 없을 테니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끝내 스스로의 '나다움'을 찾지 못하고 타인들이 만들어 놓은 '너다움' 만으로 평생을 마감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 한 줌도 안 되는 타인의 시선을 줄곧 인식한 나머지 체면, 형식, 허례, 타인의 기대 따위로 점철된 '너다움'의 허상 속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행복할까? 이제는 그 답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물론 그런 속성이 온전히 의지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실상 두뇌의 작동방식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두뇌의 논리회로가 일일이 개입해 세세하고 심도 있게 따지다간 버텨낼 재간이 없으므로, 반론의 여지가 없는 일에 대해서는 일련의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어 대응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반복되거나 확정적인 사건, 인식, 개념에 대해서는 큰 의지력이나 주의력의 소모 없이 소화하려는 기능적 효율성 말이다.


나 역시 불완전한 존재이면서 편견에 휘둘리고 깊게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두뇌의 소유자인 만큼 함부로 단정 짓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다움'을 찾을 수 있게 된 이후부터는 혹시 내가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는 타인에 대한 '너다움'을 경계한다. '쟤답지 않은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즉시 '나도 모르게 편견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라는 인식에 닿으려 노력한다. 그 과정을 통해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타인이라는 세계를 통해 나를 조금씩 확장한다.


나도 모르는 내 내면의 모습은 없을까? 실제 내면과 표면의 간극이 최대한 좁혀지도록 만드는 일. 끊임없이 성찰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


누군가 '너답지 않아' '네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네'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참지 않고 이렇게 말할 참이다.


"나 다운게 뭔데?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다 나 다운 거거든?"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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