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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Dec 03. 2023

'11월 둘째 주 화요일' 같은 사람입니다

참지, 마요 _ 내적욕구 _존재감

약 15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인사팀 대리였는데 팀장과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 명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N팀장은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나를 못마땅해했다. 무려 6년을 함께 일하며 관계가 차츰 나아지기는 했지만 초기 몇 년간은 왜 그리 정을 주지 않았는지 지금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갈등이 최고조에 달해 마침내 폭발한 건 회식자리에서였다. 2층짜리 가정집을 개조한 족발집이었는데 회사 사람들의 단골집인지라 타 팀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일도 잦았다. 그날 역시 타 팀 사람들이 우연찮게 합석을 하게 됐고 그 팀에는 N팀장이 유독 호감을 가진 K라는 직원이 있었다.


"K.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어머 팀장님~ 잘 계셨어요?

"K를 우리 팀으로 데려왔어야 했는데... 참 아쉬워"

"팀장님은 꼭 말뿐이더라. 저도 인사팀에 가고 싶다구요~"

K는 두어 자리 건너 떨어져 앉은 제 팀장을 의식했는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소곤거렸다. 짙은 눈웃음과 함께 잔을 들어 건배를 청하는 그녀를 향한 N팀장의 표정은 한껏 자애롭고 부드러웠다. 소맥 두어 잔을 연거푸 들이켠 N팀장은 맞은편 대각선에 앉은 나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쟤랑 바꾸면 어때?"

마시지도 않은 술이 확 올라오는 듯했다.

"그래요? 그럼 이 참에 제가 나가면 되겠네요!"

참고 삭히는 성격은 아닌지라 버럭! 대꾸 아닌 대꾸부터 내질렀다. 홧김에 소주와 맥주를 반반 비율로 섞은 폭탄주 대여섯 잔을 연달아 들이키고는 빈 술잔을 탁자에 턱! 하고 내려놓은 후 옷을 챙겨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렇게 나가면 어떻게 해?"

한참을 씩씩거리고 있는데 S가 따라 나왔다. 경력직으로 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나름 의지하며 동기처럼 지내던 사이였지만 나와 다른 게 있다면 N팀장과 척척 죽이 잘 맞는 오른팔격이라는 점이었다.(시간이 흘러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N팀장에 대한 직설적인 불만과 불편한 감정은 S를 통해 고스란히 N팀장에게 전해졌던 모양이다.)


"아 C 이런 대접받고 붙어 있어야 되나 모르겠네..."

"잘 좀 해. 그러게 왜 그렇게 틱틱 거려. 팀장이 하는 말, 장난이 아닌 것 같던데? 진짜로 발령 낼까 나한테 물어보더라고..."

S는 마침 조직개편, 이동 등 인사발령 업무를 맡고 있었으므로 완전히 허튼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마침내 꾹꾹 참고 있던 속내가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것 같았다. 뭘 잘못하고 있는지 명확히 지적을 해주면 차라리 나을 텐데 그런 것도 없다. 그저 주 3회 이상 틈만 나면 만들어대는 회식자리에서 술에 잔뜩 취해 '대리씩이나 되는 새끼가 제 역할은 못하고 여직원들과 시시덕 거리기만 한다'는 인신공격성 발언뿐이었다.


11월 초겨울밤, 까만 하늘엔 북극성인지 금성인지 토성인지 모를 별 하나가 외딴집처럼 박혀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달아오른 얼굴과 감정을 매만져주는 듯했다. 이내 서글퍼졌다.

'내가 이 회사에서, 적어도 저 팀장 밑에서는 존재감이 없거나 역할이 없는 거구나."


시간은 어느새 11시를 훌쩍 넘겨 자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모종의 결심을 하고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찍었다. 수신은 인사담당 상무

[상무님, 저 그만두겠습니다. 인사팀에서 더 이상 제 역할이 없는 것 같습니다. N팀장이 저를 MD팀으로 보낼 거라고 하는데, 그럴 거면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지 않기로 했다.


[지이이잉~~]

어디선가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눈을 떴다. 오전 11시. 부재중 전화가 11통이 와있었다.

그중 세 통은 팀장. 나머지는 S를 포함한 팀원들 전화였다. 무단결근. 타는 갈증과 함께 어제의 기억이 또렷이 떠올랐다. 분명 문자를 찍던 순간만큼은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중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 숙취는 뭐란 말인가? 6잔을 연달아 들이킨 반반 소맥이 문제였던 걸까? 정작 문자를 받은 상무로부터는 아무런 답도 없었다.


거실로 나가니 늦은 아침? 이 차려져 있었다. 콩나물국 몇 숟갈을 뜨고 몇번의 망설임 끝에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뭐냐?"

"..."

"임마! 아무리 내가 그랬기로서니... 그렇다고 그 밤중에 상무님한테까지 문자 보내서 회사 그만두겠다고 하고 무단결근까지 하는 건 아니지! 상무님께도 잘 말해뒀으니까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출근해."

팀장은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내 일격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실제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시적 감정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금세 증명됐다. 눈을 뜨는 순간 아차! 싶었으니까. 못 이기는 척, 아무 일도 없다는 척 출근을 하기로 했다.


다음날 출근한 나는 먼저 상무실부터 찾았다.

"상무님 죄송합니다."

가타부타 변명 없이 고개부터 숙였다. 상무는 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슬쩍 웃음을 보였다.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손짓으로 나가보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되돌아 나와. 팀장에게로 갔다.

"이유야 어쨌든 제가 경솔했습니다."

그날 팀장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일을 계기로 팀장과의 관계도 차츰 좋아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존재감의 가벼움은 나를 분노케 하고 마침내 행동으로 옮기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내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역할을 잃지 않을 것인가? 끝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 역시.


11월이 되면 종종 그날이 떠오른다. 11월이 꼭 그때의 나 같았다. 1년 중 가장 특징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달,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무색무취의 계절, 이렇다 할 기념일이나 공휴일도 없는 빽빽한 30일. 거기에 첫째 주도 마지막주도 아닌 둘째 주면서 심지어 월요일도 금요일도 아닌 화요일이라면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조합인가? 물론 그런 날까지 포함해 1년이 완성된다는 뻔하디 뻔한 위로는 넣어두자.


11월 둘째 주 화요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늘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럭저럭 대단히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대학을 나와 또 엄청 대단하지도 그렇다고 딱히 빠지지도 않는 대기업 계열사에서 5년 차 차장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존재감을 잃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을 가졌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생 전반에 걸쳐 대단한 존재로 주목받거나 그럴 위치에 있었던 적도 없지만, 스스로를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은 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선명한 존재감의 유무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분명 자존감을 유지하고 어려움에 처해도 버틸 수 있는 동력을 준 거의 유일한 요소이기도 했다.


누군가 나의 존재를 부정하려 하면 참지 않아야 하는 이유, 나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본질, 그렇다고 솟아오르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다가는 뒤죽박죽 더 꼬일 가능성 따위를 놓고 매년 11월을 맞는다.


다시는 11월 둘째 주 화요일 같은 사람처럼 나를 여기지 않기 위해 매일을 11월처럼 묵묵히 살아야겠다는 역설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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