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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Nov 19. 2023

3억으로 3년을 샀다

참지, 마요 _내적욕구_ 마음이 시키는 일

신이 물었다

"3억을 내면 3년을 주겠다. 그렇게 하겠는가?"


음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가정의 질문이니 재미 삼아 대답해 보거나 죽음 직전에 인생을 회고할 목적의 질문정도로 여기면 간단하지만, 좀 진지하게 보자면 무엇보다 일단 3억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타고난 금수저가 아닌 담에야 그만한 여유돈을 은행계좌에 넣고 사는 사람은 극히 드물 테니 말이다. 당장 쓸돈 30도 없는데 그런 쓸데없는 질문은 왜 하는 거냐? 고 짜증이 날 수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누구?

바로 여기.


사실, 바라보는 관점만 바꾼다면 돈으로 시간을 사는 일쯤은 간단하다. 일정 수입이 있는 직장인들이라면 무조건 가능하다. 회사를 그만두면 된다.


나는 직장인일 때 1년에 약 1억 정도의 기대수입이 있었다. 연봉은 대략 8000(4년 차 차장), 인센티브라던가 변동급 약 500(때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평균 수준)에 4대 보험,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연금 보험 등 비급여성 고정지원 약 500, 해마다 누적되는 퇴직금 등등 싹싹 그러모으면 대략 1억 선이 된다.


물론 기업 규모와 수준에 따라 연봉만으로도 1억을 훌쩍 넘기는 사람도 있을 테고 다 합쳐봐야 1억 근처에도 못 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40대 중반의 평균 기대수익을  대략 1억 선으로 보자는 말이다.


40대 중반 그러니까 45세에 이직을 전제하지 않은 퇴사를 하면 그 즉시 1년에 1억씩 포기하는 셈이다. 퇴직금이니 위로금이니 있겠지만 앞으로 벌어들일 기대수익만 놓고 보면 고스란히 연 1억씩 날리는 꼴이다. 고로 3년을 무직 상태로 지낸다면 총 기회비용은 3억이 된다.


관건은 그 기회비용을 어떻게 쓸 것이냐다. 즉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느냐다. 목적한 바 있어 퇴사 후 3년의 시간을 그 일을 준비하는데 전력을 다했다면 3억의 기회비용으로 3년의 시간을 산 것이나 다름없다. 그 결과가 어떻든 지난 3년의 시간은 고스란히 축적의 시간이 된다. 방향만 제대로 잡았다면 이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기회비용 그 이상으로 되돌아온다.


문제는, 퇴사 후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다. 당장 경제적인 문제가 걸린다. 거액의 위로금이건 저축이건 앞으로 완전히 끊기는 수익의 공백을 대비하지 않았다면, 온전히 그 시간을 제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당장 잔고에 돈이 없다면, 있더라도 하루하루 줄어가는 숫자를 실시간으로 지켜보게 된다면,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위해 내 모든 시간을 쏟는 일은 어지간한 용자가 아니라면 감당 못한다.


더구나 40대 중반이라면 대개 가정을 이루고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가장일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가장으로서의 역할이나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한 달도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아주아주 높다. 아무리 큰 꿈을 품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어도 이내 재취업을 고려하거나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나?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이다. 공백기간이 길어지면 일자리를 더 찾기 어려워질 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하루하루 흐르는 시간은 지옥의 사자로 돌변해 마음에 생기기 시작한 균열 곳곳을 파고든다.


나올 때 꿨던 꿈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어디든 일단 들어가고 봐야겠다 싶어 닥치는 대로 지원서를 넣는다. 아뿔싸 그런데 어쩌나. 재취업은 생각보다 어렵다. 현직에 있을 때는 XX그룹 이 차장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백수다. 전에 다녔던 회사의 명함값이 나를 증명해 줬을 뿐, 그것을 벗고 오롯이 내 이름값으로만 세상에 나와 보니 마치 발가벗은 채 한 겨울 명동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다. 춥다. 외롭다. 한없이 쪼그라든다.


S대 출신에 최고 기업의 주요 부서 근무 경력이라면 어디선가 모셔가겠지만, 그것도 2~30대, 잘 쳐줘도 40대 초반까지의 이야기다. 대개는 그럭저럭한 스펙에 직무 전문성도 증명할 수 없는 상태로 재취업 시장에 나온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게 된다. 울타리를 벗어난 세상에는 나 정도 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어쩌다 운 좋게 재취업을 하게 되더라도 전에 있던 곳보다 한참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게 다시 월급쟁이가 되고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면 현타(현실자각 타임)가 온다.


'이럴 거면 왜 나온 거야?'


이 그림이 최종 결론이라면 이전의 회사에서 이 악물고 참는 게 백번 낫지 않겠는가?


나 역시 그랬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막 45세가 되던 해였다. 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시점이었고 아내는 부업 삼아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다. 희망퇴직을 신청했으므로 퇴직금 외 위로금이 제법 됐지만, 그래서 얼마간 버틸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은 섰지만, 그 결심의 크기와 중대함에 비하면 내 준비란 것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어이없게도 길어야 1년이면 어떤 결판이 나지 않을까? 안되면 재취업하지 뭐. 거한 오판을 한 셈이었으니 지금에서 돌아보면 새삼 식은땀이 배어 나올 일 아닌가?


그간 깨달은 점 하나는 세상은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는 진리다. 의지는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굳게 마음을 먹어도 그 신념을 무너뜨리는 현실의 압박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구석구석을 잘도 찔러댄다. 어설프게 마음먹고 호승심에 사표를 내질렀다간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진리 역시 덤.


나는 회사에서 인사와 조직문화, 교육 업무를 17년간 맡았고 그중에서도 조직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언제부턴가 늘 회사에 대한 불만과 '나는 직장인 체질이 아니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사람치고는 한 직장 14년을 포함해 17년을 버텼다는 사실이 코메디 아닌가? 이쯤 되면 주변사람들은 '아 지겹다 또 시작이네. 진짜 그런 마음이면 그만두던가' 라는 속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겉과 속이 다르거나 그냥 현실에 대한 불만을 습관적으로 토로하는 투덜이 스머프 정도로 여겼을지도...


딱 이틀을 고민하고 퇴사를 결정한 이유에 '말뿐 아니라 실행으로 보여준다'는 오기가 작용한 탓도 분명 있었다. 비록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무엇보다 학창 시절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던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컸다. 대학시절 행정학을 전공했지만 입학 전 국문학 진학을 심각하게 고려했을 만큼 무언가를 쓰거나 지어내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중고등학교 때는 만화도 그렸다. 비록 그림 솜씨가 없어 그만두었지만.


마침 17년간 회사에 해온 일도 마음에 들었다. 조직문화, 사람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글이라는 하드웨어에 담는 일. 이 정도면 퇴사 후에도 뭔가 길이 보이리라 여겼다. 그렇게 퇴사를 결정했고 어느덧 3년 11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 곧 4년 차를 앞두고 있다. 그 사이 약 500여 권의 책을 읽고 200여 권을 기록하고 정리했다. a4지로 3000여 장의 글을 썼고 그중 일부는 두 권의 책이 됐다. 기업과 공공기관의 요청으로 대규모 워크샵과 특강도 해봤다. 시간당 50만 원 정도는 받을 수도 있게 됐다.


그래서 그 시간을 사서 뭐라도 됐느냐? 누군가 묻는다면 고민도 없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여전히 갈길은 멀고 불확실성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희망은 더 커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내 글쓰기 실력이 하루하루 더 좋아지고 조직과 사람에 대한 통찰은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질 것이다. 그렇게 뚜벅뚜벅 가다 보면 어디에선가 빛이 들어오고 중간지점쯤에서 귀인이 나타나 내 손 한 번쯤 잡아줄 운도 찾아오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매일을 보낸다.


인생 후반전을 나 스스로 만들고 하나둘 만들어가는 기분은 꽤 경이롭다. 다시 태어난 느낌이라고 말하긴 어쩐지 과하지만, 그 이전 45세 이전의 내게는 분명 없었던 무언가를 하나둘 만들어가는 성취감만은 선명하고 분명하다. 물론 여전히 끝도 알 수 없는 구렁텅이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기분이 더 우세하긴 하다.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면, 회사를 참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굳은 마음에 비례한 만큼 철저히 준비하자. 40대 중반에 그 실행 버튼을 누르려면 적어도 40 무렵에는 본격적인 준비를 차근차근 시작해야 한다. 무엇보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뭘 하면 내가 즐겁고 성취감을 느끼는지 찾아내야 한다. 운 좋게 회사에서 해오던 일이 적성에도 맞다면 금상첨화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날카로운 송곳은 반드시 뚫고 나올 수밖에 없다고 했던가? 단지 이곳에서만 통할 아마추어적 전문성 말고, 그 분야의 시장에 나가서도 충분히 통할만한 뾰족함을 가공하는 일, 바로 프로페셔널이 되기로 작정하는 일이다.


실력 보다 누구의 사람인가, 사내정치와 관계 같은 요소로 좋은 평가를 받고 승진이 결정되는 회사에서 일한다면 10년 15년 20년을 일해도 사실상 제자리다. 직무역량에 있어 성장을 멈춘 '사회적 난쟁이' 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나와보면 그 즉시 깨닫게 된다. 50세 이후 제2의 인생을 꿈꾼다면 사회적 난쟁이에 머물러선 곤란하다. 익숙함과 안온함의 고리를 스스로 끊고 본격적인 프로의 세계로 접어들기로 결심해야 한다. 그 길은 분명 힘들고 괴롭고 외로운 여정이 될 것이다. 그저 홀로 묵묵히 쌓아 올려야 하는 축적의 시간이다.


그다음은 돈을 모으는 일이다. 퇴사 후 최소 3년을 바라보고 그 기간 동안 아껴 쓰면 생활에 크게 문제가 없을 정도의 돈을 확보해야 한다. 배우자를 포함해 누군가 돈을 벌고 있더라도 내 몫의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서라도 일정 금액의 여유 자금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게 퇴사 후의 시간을 사기로 했다면 이제 다 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나 외의 모든 것을 참지 말자. 나를 방해하는 것, 흔드는 것, 안될 거라고 조롱하는 모든 것들에 버럭! 화를 내지르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자.


기대수명 100세 시대. 10~20대에 공부한 것으로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기는 벅차다.  50km를 겨우 갈 수 있는 연료를 넣어놓고 100km를 가겠다는 꼴이다. 인생 절반쯤에 이르러 반드시 한 번쯤은 재주유를 해야 한다. 또다시 20대 그 어디쯤으로 돌아가 열정과 가슴 뛰는 꿈을 가진 젊은이가 되어 절반이나 남은 미래를 준비해야 마땅하다.


에이 회사 다니면서 사부작사부작 공부하고 준비하지 뭐. 아서라 어림도 없다. 어떤 영역이든 오직 실력만이 나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프로페셔널의 세계에 뛰어들 생각이라면 이를 악물고 준비해야 한다. 전력을 다해 수년을 쏟아부어도 될까 말까 하다는 냉혹한 진리를 알게 되면 회사를 나올 엄두가 안 날지도 모른다. 퇴근 후 2~3시간? 정도의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다. 그 역시 웬만한 직장인들이라면 한 달 이상 유지하기도 힘든 대단한 노력이지만 글쎄, 턱없다.


물론 엄청난 능력자가 있어 퇴사 1년 만에 월급을 뛰어넘는 수익을 내고 제2의 삶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를 잘 알지 않은가? 바로 어제까지 그냥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유튜브 속 넘쳐나는 듯 보이는 수익 파이프라인을 만들어 경제적 독립을 이룬 사람들이 사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들어가는 인풋 없이 절대로 그 이상의 아웃풋이 나오지 않는다는 냉혹한 진리를 깨달을 뿐이다.


다시,

어디선가 신이 나타나 묻는다

"3억을 내면 3년을 주겠다.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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