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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영작가 Nov 27. 2019

부치지 않은 편지

나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간직하며 살았던 걸까

 오래된 책 한 권을 다시 읽어보려고 꺼내다 뭔가가 툭하고 떨어졌다. 노트에 쓴 손 편지였다. 빛바랜 책표지처럼 편지도 그랬다. 2003년 4월 20일에 내가 쓴 편지였다. 


 ‘왜 주인에게 가지 못했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오래 전 ‘나’와 만나는 기분으로. 설레기까지 했다. 인도로 비행을 갔을 때 호텔방에서 쓴 편지다. 아주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던 남자친구에게 그리운 마음을 담아 쓴 편지. 인도에 머무는 3박 4일 동안의 일상을 써놓은 편지였다. 편지를 읽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간직하며 살았구나.’


 편지 속에 존재하는 ‘나’는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더 어른스럽고 귀엽기까지 했다. 냉정하고 일밖에 모르며 살았다고 생각했었는데 과거의 진짜 내 모습과 마주하며 웃음이 났다. 지금의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 같았다.


 제임스 샤이블리(James Scheibli)의 <짧지만 위대한 명대사>에는 마음에 가까이 다가오는 명대사들이 수록되어 있다. <조 블랙의 사랑>에서 윌리엄 패리쉬의 명대사를 소개한다. 


 “사랑은 열정이자 집착이야. 그 사람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고 돌아버릴 것 같은 게 사랑이야. 내가 미치도록 빠질 사람, 내게 미치도록 빠질 사람을 찾아야 해. 어떻게 찾냐고? 머리가 아닌 가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지금은 전혀 들리지 않잖아. 사랑이 없는 삶은, 살아도 의미가 없어. 그 길을 걸어 보지 않은 사람은, 깊은 사랑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없어.”


 이런저런 이유로 사랑은 피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명대사가 있다. <사랑과 죽음>에서 소냐의 대사다.


 “사랑은 고통이야. 고통을 피하려면 사랑하지 않으면 돼.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랑하지 않기에 고통스럽지. 그러니까 결국 사랑은 고통, 사랑하지 않는 것도 고통, 고통은 고통이야. 행복은 사랑이야. 그러니까 행복 역시 고통이거든. 하지만 고통 받는 이는 불행해. 그러므로 불행하려면 사랑을 하든가, 고통을 사랑하든가, 아니면 행복에 겨워 고통스러우면 돼. 내 말 적고 있지?”


 내게도 그랬다. 사랑은 고통이었고 사랑 없는 삶도 고통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면서 느끼는 고통이 사랑하지 않는 고통보다 낫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임이 분명하니까. 사랑마저 없다면 정말 고통스러울 테니까.


 누군가 그랬다. 힘들어서 사랑을 버렸지만 사랑 없는 인생이 얼마나 무의미한 지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사랑할 땐 그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기 힘들다. 뜨겁게 사랑하는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그래서 떠나보면 안다. 그 사랑이, 그 사랑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달콤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궁금해진다. ‘왜 편지를 전해주지 않았을까?’ ‘편지를 써놓고 책 속에 끼워놓은 걸 까먹었던 걸까?’ ‘편지를 쓰고 나서 마음이 변했나?’ 

 오늘은 하루 종일 그때의 ‘나’와 대화를 나눈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이후의 삶에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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