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일종의 약자(略字)?

by 느림

저는 라틴문자와 한글을 병용해 필기를 합니다. 같은 내용을 쓸 때, 한국어-한글로 쓰면 독일어-라틴문자로 쓸 때보다 시간이 더 적게 걸리는 경우가, 즉, 그어져야 하는 획의 총량이 더 적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기엔 물론 독일어에 긴 단어가 조금 잦은 편인 탓도 있습니다만, 저는 이 현상이 영어-라틴문자로 필기를 해도 나타나리라고 봅니다. 어차피 빠른 필기 시에는 많은 문법적 요소를 제거하고 요점이 되는 단어만 쓰는 경우가 많으니 관사 (예컨대 영어의 a, an에 해당하는 독일어의 ein, eine, einem, einer, einen) 때문에 더 길어지는 경향도 별로 없고, 유난히 긴 단어가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 요인은 어디에 있는가? 사실 우리말 낱말들 중에는 한자어(漢字語)가 많습니다. 제목(題目)에 있는 '약자(略字)'만 해도 그렇죠. 몇 가지 예시(例示)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글 / 한자 / 영문 / 독문

현상 / 現象 / phenomenon / Phänomen

현상 / 現狀 / present state / jetziger Stand

현상 / 現像 / developing / entwickeln

현상학 / 現象學 / phenomenology / Phänomenologie

군 / 軍 / military / Militär

군 / 群 / group / Gruppe


한자가 아니라 한글로 써 놓으면 손실되는 정보가 있습니다. '현상'이라고만 써 놓으면 위에 써 놓은 세 현상 중에 무엇을 말하는 건 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빠진 정보를 맥락 파악을 통해 보충해 넣습니다. 한글 전용에 익숙하니까 이 빠진 정보 채워 넣기를 무의식 중에 순식간에 해치우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자각이 잘 없을 뿐이죠. 그 낱말이 원래 전해야 하는 정보를 온전히 종이 위에 옮기려면 한자로 써야 합니다. 그러면 한글로 쓸 때보다 훨씬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영어나 독일어로 쓸 때도 한글로 쓸 때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릴 텐데, 이 경우엔 한자로 쓴 것과 마찬가지로 온전한 정보를 담고 있는 단어를 쓰게 됩니다. 만약 영어나 독어를 약자(略字)로 쓰게 되면 같은 뜻의 말을 한글로 쓰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약자는 맥락을 통해서 무슨 단어인지 추측해야 하니, 한글과 사정이 비슷하지요.


그러니 한글로 쓰면 영어나 독어로 쓰는 것보다 시간이 덜 걸리는 건 정보의 손실을 감수함으로써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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