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포산 미스터리-2
공주라면 키우는 다람쥐 한 마리 정돈 있잖아?
재린은 최근 부쩍 우울감에 시달렸다. 무언가 열정을 쏟아붓고 싶은 갈증은 지속되었지만 열정을 쏟아부을 무언가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계속해서 왕국의 번영을 위해 공부하고, 성취하고, 합격하고, 도전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이루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더 이상의 스텝에 도전하는 것도 두려웠다.
만 28세. 치열해야 하고 치열해야 살아남는 시대와 나이.
재린은 꾸준히 중간 순위에서 달리다 도저히 따라잡을 엄두가 나지 않는 선두주자와
조금 속도를 늦춰도 영영 따라오지 못할 것 같은 꼴찌 선수를 번갈아 보고는 우뚝 멈춰서 버린 달리기 선수가 된 기분이었다.
사귄 지 1년 반 정도 지난 남자친구와 나누는 카톡도 시들했다.
강남의 회사에서 재림이 살고 있는 공덕까지 바로 오는 740번을 타고 오는 퇴근길,
재림은 멍하니 손잡이를 잡고 버스 창 밖을 바라보면서 답이 나오지도 않는 미래에 대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생각했다.
이직, 결혼, 출산, 육아, 집, 돈, 친구, 가족...
휴대폰을 보고 있지도 않는데 멀미가 나는 듯했다.
집에 돌아와 밥 먹으라는 엄마의 말에 짤막히 먹고 왔다고 답하며 방으로 들어가 침대로 직행했다.
"뭐 한 것도 없이 지치냐 왜...."
[재린이는 밥 먹었오??]
재린의 남자친구 경민은 매일 똑같은 시간 똑같은 질문을 하는 데도 질리지가 않는 듯했다.
[오빠. 오빠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심심한 적 없어?]
1이 사라지지 않는다. 재린보다 통근거리가 멀어 귀가시간이 늦는 경민은 필히 퇴근길 지옥철에 시달리는 중일 것이다.
재린은 폰을 내려놓고 책상으로 눈길을 돌렸다.
요정충신은 벙거지 모자를 가지런히 옆에 벗어놓고 재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무슨 말이든 들어줄 표정으로. 재린은 그들의 공주였으므로.
"나 이직하게 해 줘. "
재린의 말을 들은 요정은 공손히 모자를 집어 쓰고 방문 밖으로 나가려다, 뒤돌아서 재린을 다시 바라보았다.
방금 내린 그 결정에 번복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최근 ‘이직' 문제에 관련해서 재린이 번복한 적이 꽤 많았으므로.
"아 나 청년내일채움공제 3년 아직 멀었지?"
요정은 표정변화 없이 고개를 돌려 홀연히 사라졌다.
재린은 입사 직후 중소기업 취업자 대상의 적금을 들었고, 이 회사에 3년 근속해야 3천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2019년 초부터 적금을 들었으니 반년은 더 버텨야 받을 수 있었다.
이직이라는 변화가 오기 전까지 재린의 왕국은 잠시 번영과 발전이 일시정지 상태이다.
재린이 공주로서 처음 능력이 발휘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재린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를 했는데 같은 구 안에서 이사를 한 거라 전학은 가지 않았고
다만 기존 학교 가던 길에 비해 약 10분 정도 더 먼 거리를 걸어야 했다.
이사 간 집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는 큰 저수지를 지나고, 큰 산을 끼고 걸어가야 했는데 이 길에는 종종 다람쥐가 나왔다.
'사람을 경계하는 다람쥐이지만, 백설공주와 같은 동물친화적인 능력이 있다면 저 다람쥐가 날 따라올 테지. ‘
하는 생각으로 재린은 멈춰 서서 다람쥐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다람쥐는 멈칫멈칫 재린의 앞까지 내려왔고 재린의 눈높이 정도까지 내려와, 앞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 먹었다.
재린은 천천히, 한 걸음씩 걸었고 작은 목소리로
“다람쥐야, 나는 공주야. 나를 따라와. ”
라고 말했다.
다람쥐는 멈칫 멈칫 재린의 걸음걸음을 따라오며 자꾸만 무언가를 주워 먹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다람쥐는 다시 산 위로 뛰어 올라가 사라졌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재린이 학교를 갈 때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는데도 다람쥐가 나타났다.
공주라면 동물이 따르는 게 당연하므로 재린은 이 순간이 공주로서 첫 능력을 발휘한 날임을 알게 되었다.
강훈은 울산에서 태어났다. 이사도 몇 번 하지 않고 계속해서 울산 동구에서 자랐다.
크게 빗나가는 일탈도 하지 않고 적당히 학교에서도 튀지 않는 평범한 학창생활을 보내고 자연스럽게 경찰시험을 준비했다.
대학교야 부산에 있는 국립대학교 경영학과에 합격은 했지만, 하고 싶은 일이 딱히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점수 맞춰 합격한 대학이라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서 바로 경찰시험을 준비하고 운이 좋게도 1년 만에 합격했다.
그 길로 대학교는 자퇴했다.
경찰 생활도 그냥저냥 중간 정도. 처음엔 울산 서부파출소에서 근무를 했다.
다만 치안 좋고 조용한 지역에다 근처 초중고등학교까지 있는 탓에 끽해야 취객신고가 월 1건 들어올 까 말 까여서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강훈은 2년 정도 수사경과시험을 준비하며 형사가 되기로 했다.
수사경과시험 합격 후 1년 뒤에 울산 동부경찰서 형사과 티오가 나, 발령받을 수 있었다.
형사과 일은 딱 생각했던 만큼 힘들었다. 묘하게 큰 일은 없으면서도 한 번씩 일이 터졌다.
다만 강훈이 발령받을 시기에 내부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황이었던 터라 어쩌면 사건이 많지 않은 게 다행이기도 했다.
지극히 평범한 인생에 지극히 평범한 성격 탓에 연애를 해볼까 싶어 소개도 몇 번 받았다.
대부분 결혼을 빨리 하고 싶어 하거나 혹은 강훈과 같이 울산에서 나고 자라 울산에서 전문직으로 일하거나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결혼 욕심도 딱히 없고 이렇다 할 도파민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 강훈은 연애마저도 2년-3년 정도 지속하다 결국 성격 차이로 헤어지기 일쑤였다.
크게 마음을 쏟지 않았기에 헤어짐의 여파도 없었다.
만났던 여자 중에는 서울이 고향이지만 과거 만났던 남자친구를 따라 울산에 내려와
남목동에서 작은 개인카페를 운영하게 되었다던 2살 연상의 여자친구가 있었다.
다시 서울로 가자니 금전적인 여유가 없고, 이미 울산에 자리를 잡아 아직 큰 변화를 맞을 준비가 안 되었다던 그 사람은 헤어지며 강훈에게 말했었다.
“너처럼 단조로운 사람을 만나서 좋았어. 내 삶은 충분히 안정적이었고, 더 확실한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배우자를 찾은 건데 내 일상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을 사람이었거든. “
“근데 왜 헤어지자 하는데? ”
"그 사투리가 싫어."
강훈은 늘 평범하고 변화 없이 밍숭밍숭한 설렁탕 같은 자신의 삶에 굵은소금이 들어온 듯이 짜릿함이 느껴졌다.
평범한 연애, 평범한 여자들, 평범한 헤어짐. 그러나 늘 그 핑계는 다채롭다. 이번엔 사투리라니.
이 다채로운 거짓핑계들에서 오는 짜릿함을 느끼기 위해 연애를 하는가 싶을 정도로 자신의 변태적인 감상이 놀라웠다.
"확실한 사투리를 쓰는 것도 아니고, 억양은 너무나도 경상도인데 묘하게 사투리가 어색해서 싫어. 말투도 안정적인 사람을 만나고 싶어."
기가 찼다. 울산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여행이라곤 제일 멀리 가본 곳이 경주였다.
오리지널 네이티브 울산사투리를 쓰는 자신에게 사투리가 어색해서 헤어지자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그러냐고. 알겠다고. 잘 지내라며 헤어진 후 한 동안은 전 여자친구는 쉽게 잊은 채 지냈다.
다만 전국 각지에서 발령받아 온 사람들이 모여사는 현대중공업 산업단지를 지나다니며 들려오는 다양한 말투를 들을 때마다
자신에게 '사투리가 어색하다'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긴 했다.
소나기가 갖게 내리던 여름, 조용한 일요일 아침에 서부파출소로부터 전화가 왔다.
반려견 야외배변을 위해 서부초등학교 뒤 야산으로 새벽 산책을 나갔던 주민의 신고를 받았다고 했다.
꽤 깊숙이 들어가 배변을 보던 반려견이 비가 와서 무른 흙을 파기 시작했고 거기서 백골사체를 발견했다는 신고였다.
위치는 서부초등학교보다는 현대고등학교 주차장 뒤편이 더 가까웠고 등산로와는 한참 멀고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닌지라 오랜 시간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강훈은 신고를 접수하고 조사를 나가서도 감흥이 없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울산 동구에서, 뒤돌면 미취학아동일 시절부터 친구였던 사람을 마주치는 동네에서,
하물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붙어있는 뒤편 야산에 백골이 나왔다 한들, 그게 어떤 큰 사건과 관련될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백골은 별 것 아닐 것이다.
술에 진탕 취해서 야산 초입부에 들어선 판잣집으로 가려다 길을 잘못 들어 선 취객이었거나,
십몇 년 전 실종된 노숙자였을 것이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