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첫 사형집행

염포산 미스터리-3

by Ann

공주의 첫 사형집행공주의 첫 사형집행

재린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고, 우산을 쓰고 학원 가방을 발로 차면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저 멀리 아파트 단지 입구 쪽에서 한 아저씨가 서 있었다.


재린이 걷는 바로 옆에는 빽빽이 차들이 일렬로 주차를 해 놓았고, 길 맞은편에서 보면 키가 작고 어린 재린은 완벽히 가려질 수 있었다.

입구에 서 있는 아저씨는 입구를 향해 걸어오는 재린을 바라보고 서 있었고 우산을 쓰지 않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입구를 등지고 길가에 주차된 차 옆에 서서 길을 막고 서 있으니, 아파트 단지에서 드문드문 나오는 주민들도 아저씨의 등에 가려 재린을 볼 수가 없었다.


재린은 가방을 차고 있는 자신의 발에 집중하느라 자신이 어느덧 그 아저씨 앞까지 온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퍽. 가방을 13번째쯤 찼을 때 아저씨의 허름한 운동화 끝이 보였다.

퍽. 가방을 14번째쯤 찼을 때 아저씨의 정강이가 보였다.

퍽. 가방을 15번째쯤 찼을 때 아저씨의 새까만 성기가 보였다.

퍽. 아저씨 옆으로 비켜 걸어가면서 재린은 가방 차는 것을 멈추었다.


다만 앞만 본 상태로 뻣뻣하게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고 아까보다는 빨라진 걸음으로 최대한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얼른 재린의 아파트 동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늦은 시간이 아니었기에 아파트 여러 동에서 출입을 하는 주민들이 있었고 입구에 들어서서

겨우 뻣뻣해진 목을 돌려 뒤를 보았을 때 여전히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보였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엄마에게 방금 전 일을 일렀고, 베란다 밖으로 내다보니 이미 그 아저씨는 사라지고 없었다.

재린은 방으로 들어왔고, 자신의 방 2층 침대 난간에 걸터앉아 자신을 보고 있는 요정을 발견했다.


"버버리맨을 처음 봤거든. 혹시나 뒤에서 칼로 찌를까 봐 엄청 무서웠어."

요정 충신은 조금의 감정 동요도 없이 재린을 바라보았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그 사람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어. “

재린은 곰곰이 생각했다. 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재린이 생각하는 가장 큰 벌을 주고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에게 가장 큰 벌은 '죽음'이었다.


"사형. 그 아저씨는 사형이야. “

요정은 천천히 침대 난간에서 일어나 2층 침대 계단을 내려왔고 다시 천천히 재린의 방문 밖으로 나가 사라졌다.


재린이 사형을 내린 건 처음이었다. 그전까지는 거짓말이 걸리지 않기를, 혹은 공부한 게 시험에 나오기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당하지 않기를. 모두 재린의 충신이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덕에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웬만한 일에는 쉽게 벌을 내리는 명령은 하지 않았다. 재린은 낙천적인 편이었고

사람관계에서 누군가를 벌하고 싶을 만큼 미워해본 적도 없었기에 대부분의 명령은 타인을 향하기보다는 재린 위주로 흘러갔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친구 관계가 예민해질 때 즈음 재린이 친구에게 가장 크게 내렸던 벌은 ' 친구들에게 미움을 받아라: 정도였다.

하지만 공주는 왕국을 통치하는 역할이지, 공주가 원하는 대로 독재하는 역할이 아니었다.

요정충신은 재린의 이기심과 왕국의 평화를 위해 적절히 그 중간 중재를 잘해주곤 했다.


재린의 초등학교 운동장 한편에는 3단 높이의 철봉이 있었다.

재린은 어려서부터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편이었기에 철봉클럽을 만들어

친구들과 쉬는 시간이나 하고 후에 철봉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철봉클럽 창시자로서 재린은 여러 기술을 직접 선보이며 철봉 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새롭게 만든 기술은 철봉 위에 앉아, 다리 사이에 손을 꼬지 않고 나란히 철봉을 잡되,

한 손은 손등이 앞을 보도록, 다른 한 손은 손바닥이 앞을 보도록 반대로 잡아서 앞으로 도는 기술이었는데,

이상하게 이렇게 돌면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신기술을 연습하던 도중, 재린이 바닥으로 고꾸라지지 않게 뒤에서 잡아주던 친구 한 명이

재린의 머리를 철봉으로 그대로 눌러버리는 바람에 재린이 코피가 났다.

재린은 눈물을 꾹 참고 있었고, 다른 친구들은 얼른 그 친구에게 휴지를 가져오라고 했다.

재린의 눈에는 그 친구가 낄낄거리며 교실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고, 옆에서 재린을 멀뚱히 올려다보고 있는 요정에게

"저 친구가 돌아오면 친구들이 저 친구를 미워하게 해 줘."

라는 명령을 했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이 명령이 합당한 벌이 아니었던 듯했다.

그 친구가 돌아오자 다른 친구들은 재린 코피만 닦아주고 위로해 줄 뿐 그 친구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친구는 울먹이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아까는 이렇게 코피가 심하게 나는 줄 모르고 웃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기에 겁이 났다는 말과 함께.


공주에게 피해를 준 죄인이 직접 반성을 했으므로 재린의 명령이 직접적으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적절한 벌을 내린 것이라 알게 되었다.


그러니 재린이 처음으로 선포한 사형도 엄중히 검토되어 진행될 것이었다.

재린은 우선 요정충신에게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대의 벌을 내리고 싶다는 의사를 비췄으니,

충신은 으레 그랬듯이 적절히 참작하여 벌을 내릴 것이었다.


그 뒤로 재린의 학원이 마치면 재린의 엄마나 회사에서 퇴근한 아빠가 데리러 나왔다.

그 덕에 재린은 더 이상 변태아저씨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재린이 모르는 어딘가에서 재린의 명령이 시행됐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행여나 그게 사형이라 해도, 공주에게 험한 꼴을 보이지 않고 적절히 벌을 받았을 것을 알 수 있었다.




"국과수 결과 나왔는데, 여자라데요. "

동료 진성이 국과수 검사 결과지를 넘겨주었다.

"나이나 사인 이런 건 뭐 정확하게 나온 기 없고, 추정하기로는 10대 후반? 아님 20대 초반 정도?

너무 오래돼가 발견되기도 했고, 주변에도 뭐가 없어가, 사망 추정 연도 찾아내는 데는 더 걸린다 하고요."


강훈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팀장은 어젯밤부터 현대중공업 생산직 근무자들이 다투다 한 명이 술병에 머리를 맞아 쓰러진 사고 신고에 조사하러 간 상황이었다.

아직 정확히 뭐가 나오지도 않은 상황에 백골사체 나이가 10대~20대 여성으로 추정된다는 기사까지 나가면

학부모들의 민원 전화로 형사과 내선전화가 다운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사건 조사 후 복귀한 팀장은 증거물 술병으로 강훈의 머리를 내리칠지도 모를 일이었고.


"일 복잡해진다 하... “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어쨌든 사체가 백골상태가 되려면 최소 10년 이상은 지났을 터.

10여 년 전 젊은 여성의 시체가 학교 뒤 야산에 묻혀 있다면 어떤 범죄사건의 피해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10 몇 년이 지나도록 관련 실종 신고 접수가 없다면 신원확인이 어려운 사람이었을 테고,

그럼 이 사건은 계속 민원에 시달리며 시간이 해결해 주길 기다리다 미제사건이 되거나,

자살일 가능성을 쥐어 짜내어 자살사건으로 종결하거나.


이러나저러나 적당히 평화롭던 강훈에게 큰 스트레스가 찾아온 건 변함이 없었다.


묘하게 강훈의 평범하던 일상에 금이 간 것 같은 소름이 돋았다.


"일단은 민원 연락 오거나 기자 만나도 최대한 안 새어나가게 조심하고, 15년~10년 전 실종접수 건 중에 10대 20대 여자 자료는 싹 모아보자. “


기자한테 얘기만 흘리지 않았어도. 자꾸만 과거 선택에 후회를 하게 되었다.

사실 이제 와서 백골이 발견됐다고 한 들, 급하게 찾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제사건을 재수사 중인 것도 아니기에 급할 건 없었다.

다만 우연히 열정 넘치는 기자가 신고가 들어온 즉시 강훈을 떠봤고, 큰 사건이 많지 않았던 차에 방심하던 강훈이 무심코 흘린 얘기가 기사로 나갔고,

하필 평화로운 울산 동구에, 평화로워야 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옹기종기 붙어있는 뒤 야산에서 백골이 발견돼서,

학부모들의 민원이 빗발치는 바람에 빠르게 결론을 내야 했다.

그리고 최대한 좋은 쪽으로, 그게 아니라면 덜 나쁜 쪽으로 결론을 내어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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