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방

염포산 미스터리-4

by Ann

재린은 늘 무리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잘 떨쳐내는 능력이 있었다.


재린이 초등학교 3학년일 때 나은, 정인과 셋이서 친하게 지냈었다.

재린의 초등학교 앞에는 육교가 있었고, 셋은 하굣길에 육교를 건너서 집으로 같이 갔다.

하루는 육교 밑에 나은, 정인의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은의 엄마는 재린에게 물었다.

“너 휴지통에 나은이 이름 빨간색 펜으로 써서 욕 쓴 다음에 버렸니?”


해맑게 아무것도 모르던 재린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무언가에 휘말린 기분이 들었다.


도무지 저 아줌마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지금 아줌마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는 단어인 양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배워본 적도 없는 단어인 양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인이 휴지통에서 그런 거 본 적 있어?”

정인은 순수하고 말간 얼굴로 대답했다.

“빨간색으로 ‘이재린 바보’라고 쓴 건 봤는데...”


그 뒤로 집에 갈 때까지는 재린은 일시적으로 기억이 없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를 보자마자 현관에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고,

재린의 엄마가 곧이어 나은의 엄마에게 전화한 것과 다음 날 나은의 엄마가 주스 한 박스를 사서

재린의 집에 찾아와 사과한 것만 기억이 났다.


도무지 그때 나은이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지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조금도 추측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 후로 재린은 정인과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나은은 다른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다.


재린이 중학교를 다닐 때는 아영, 은주와 친하게 지냈다. 아영은 키도 컸고, 리더십도 있는 편이었지만 성격이 센 편이어서 종종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곤 했다.

재린은 어느 날 은주에게 조용히 한 마디를 건넸고 그게 모든 일의 시초가 되었다.

“가끔 아영이가 나한테 좀 이기적인 것 같지 않아?”


그 후로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은주도 동조했고, 재린과 은주는 둘만의 비밀이 생겼다.

그리고 서서히 아영을 빼고 놀기 시작했고, 아영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재린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기숙학교를 다녔다. 4인실을 쓰면서 지영이라는 친구에게 불만이 생겼다. 재린은 역시나처럼 다른 친구들에게 가벼운 한 마디를 했다.

“지영이는 가끔 나한테 좀 투정을 부리던데, 너흰 괜찮아?”


그 후로 지영은 4자 대면을 통해 청문회 하듯 같은 방을 쓰는 친구들의 불만을 들었고, 미안하다며 고치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다른 방에 있다가 오는 시간이 늘어났다.


재린은 함께 지내는 무리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걸 보며, 이 또한 공주의 능력임을 알게 되었다. 추방명령의 효과였다.




백골이 발견된 곳 근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붙어있었다.

서부초등학교 정문 옆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학교 뒤 야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나왔고, 종종 학교 소풍으로도 가는 곳이었다.

초등학교 바로 앞에는 현대중학교와 현대고등학교가 붙어 있었다.

덕분에 서부초등학교에서 하교하는 학생들이 솜사탕을 먹고 있으면 짓궂은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솜사탕을 빼서 도망가는 일이 빈번했다.


학교가 인접한 덕에 서부초등학교를 졸업하면 현대중학교, 현대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게 가장 좋은 루트였다.

강훈이 그 운 좋은 루트를 탔다. 아마도 한 번도 이사 가지 않고 울산 동구에서 산 덕이 컸다.


강훈이 서부초등학교를 다닐 시절 5학년 때까지도 한 학급 당 인원이 많지 않았다.

전학을 가는 일도, 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 덕에 모든 학급 친구들과 친할 수 있었고 한 학년 전체가 한 학급 같았다.


강훈은 학교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 명덕 1차 아파트에 살았다.

친구들도 대부분 같은 단지에서 살거나, 혹은 학교로 가는 길목에 이어서 있는 명덕 2차 아파트에서 살았다.

등하굣길마다 친구들을 만나서 같이 갔고 집부터 학교까지 그냥 친척집에 온 기분이었다.


단점이 있다면, 인원수의 변동이 크지 않다 보니 초등학교 1~2학년 시절 굳어진 계급이 고학년이 될 때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강훈이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무렵 학교 앞에 성원상떼빌이 지어졌고, 울산 현대중학교, 현대고등학교 축구부에 진학하기 위해 각 지역에서 축구부 친구들이 전학을 왔다.


운동부 애들이었고, 작은 울산 동구의 초등학교보다 훨씬 인구 많고 규모가 큰 곳에 있다가 온 친구들이라 무섭기도 했고 실제로 피부도 까맣고 키도 컸다.


이 덕에 서부초등학교의 오랜 시간 굳어진 계급은 허물어졌다. 마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처럼 무엇이든 두려울 게 없어 보이던 서부초의 영웅들은 꼬리를 내리고 다녔다.


강훈에게도 가끔씩 시비를 걸곤 하던 건영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키도 작고 왜소한 체구였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형만 3명이라는 소문과 어린 나이인데도 벌써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다니질 않나,

묘하게 건들거리는 모습이 주변 친구들에게 위협감을 주었다.

건영은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지만 그냥 그렇게 건영이 학교 짱이 되었다.

6학년이 되어 강훈과 건영은 같은 반이 되었는데, 우수수 전학을 온 체육부 친구 중 가장 키가 큰 친구가 강훈의 옆자리가 되었다.


건영은 강훈의 옆을 지나가다, 자신의 머리에 굳은 왁스를 떼서 강훈의 머리에 발랐다.

“야야 강후이 아씨 나 어제 형들이 졸라 머리에 발라서 니 쫌 준다”

막상 강훈은 별 생각이 없었지만 옆자리 친구는 생각이 달랐던 듯했다.

“그거 머리 감으면 없어지는데? 지금 머리 안 감고 강훈이 괴롭히는 건가?”


똑 부러지는 표준어에 순수한 듯 양심을 찌르는 질문에 강훈은 멍하니 짝을 바라보았다.

건영은 잠시 멈춰 당황한 표정을 짓다 이내

“아아~ 아니 강후이 가끔 왁스 발라달라 해갖고 “

라며 황급히 뒷문으로 나갔다.

그 후로 건영은 다시는 강훈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강훈의 옆자리 짝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했으나, 뉴페이스가 불러온 변화가 얼마나 큰지 강훈은 가슴 깊이 느끼고 있었다.


강훈이 눈을 감고 과거 회상에 젖어있던 차에 팀장이 들어왔다.


“사체 근방에서 명찰 나왔다. 이름 부분은 부러지가 확인해 봐야 카는데, 초록색 쪼가리 나왔단다. “


초록색. 울산에서 플라스틱 명찰을 쓰는 학교 중에서 초록색 명찰을 쓰는 학교를 찾아봐야 한다.

조사 범위가 줄어든 것에 감사해야 할지 더 찝찝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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