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죄가 없어.

염포산 미스터리-5

by Ann

재린은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여자중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진학을 앞두고 이사를 갔고, 동시에 남녀공학으로 전학을 갔다.

중학교 2학년 반배정이 되기 전, 봄방학을 앞둔 시점에 전학을 가게 되었고, 그 덕에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재린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여중을 다니던 여학생의 전학이니 특히 남학생들의 관심이 높았다.


재린은 전학 간 학교에서 교탁 맨 앞자리에 배정 받았고, 옆자리 짝은 남학생이었다.

재린은 전학이라는 걸 처음 해봤고, 낯선 환경과 반 배정이 되기 전 뒤숭숭한 반 분위기에 적응을 하지 못 하던 터였다.

옆자리 짝은 힘찬이라는 남학생이었고, 전학 와서 낯설어하는 재린을 나름 잘 챙겨주었다.

이틀 정도 지나니 나름 재린을 챙겨주는 친구들도 생겼고, 그럭저럭 적응을 하고 있었다.

전학간 지 이틀이 지나고 재린의 반에 유럽으로 가족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여학생이 왔다.

여학생은 힘찬의 여자친구라고 했다. 재린이 등교하자 보인 건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힘찬의 여자친구였다.

”야, 여기 내 자리야.“

‘민하’라는 이름을 가진 그 친구는 대뜸 재린에게 영역시비를 걸어왔다.

재린은 옆에 있는 요정충신을 바라보았다. 충신도 뭘 어찌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별 도리없는 눈빛으로 재린을 바라보았다.

“쌤이 여기 앉으라던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재린이 말했다. 공주가 이렇게 볼품 없는 위치라니. 온 반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재린은 어디론가 달려가서 사라지고 싶었다.

대체 자신이 잘못한 게 무엇인지, 그저 전학을 와서 선생님이 앉으라는 곳에 착실히 앉았을 뿐인데,

이틀 동안 무탈하게 잘 지냈는데, 왜 이런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지 모를 뿐이었다.


“힘찬 내 남친인 거 몰라? 꺼져.”

몰랐다. 알았다고 한 들, 재린과 무슨 상관인가. 재린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로 맨 뒤 비어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전학 첫 날부터 재린을 챙겨주던 친구가 조용히 재린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같이 앉자는 무언의 사인이었다. 그 친구는 1년 동안 반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소위 말하는 ‘왕따’인 듯 했으나,

지금 재린에게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편이 한 명이라도 있는 것이 중요했다.

힘찬은 이 모든 상황에서도 그저 교탁에서 영화를 틀며 재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숨죽이던 반 아이들도 그제서야 다시 시끌시끌 고개를 돌렸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잔뜩 긴장한 상태로 하루를 보냈다.

하교 후 학원을 갔다가 집으로 귀가하는 길에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야.]

재린은 뭐라 답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야, 씹냐?ㅡㅡ]


‘누구야?’라고 물으려던 마음을 접었다.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씨발년. 씹냐고ㅡㅡ]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관자놀이에서 두근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집으로 가는 길이 울렁거리는 것처럼 보였고, 그 자리에서 바로 주저앉고만 싶었다.

마치 칼을 든 강도에게 협박을 당하는 것만 같은 공포심이 재린을 감쌌다.

주변을 둘러봐도 요정충신은 보이지 않았다. 재린은 완벽히 혼자였다.


문자를 보내던 그 번호로 전화가 왔다. 재린이 전화를 받자마자 낯선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렸다.


“야 나 누군지 몰라? 나 양휘연.“

정말 안타깝게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야, 나 민하 친군데. 닌 뭔데 힘찬한테 자꾸 껄떡대? 니가 힘찬한테 번호 물어보고 말 걸고 그랬다며?

걔 민하 남친이거든? 씨발 씹냐? 말 안.하냐?“


계속해서 쿵쿵 뛰던 재린의 관자놀이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마에선 열이 났고,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억울함과 분노가 차올랐다.

재린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나왔다.

“난 니가 누군지도 모르고, 힘찬인지 뭔지랑 얘기도 안 나눠봤고, 민하 걔랑 사귀든 말든 상관도 없다고.

내가 언제 껄떡댔냐고!!!!“


[뚝.]

재린이 억울하게 소리치는 도중에 전화는 잔인하게 끊겼다. 일방적인 공격이었다.

재린은 손끝부터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차갑게 식은 손은 덜덜 떨렸고, 눈물은 멈췄다.

발에 쥐가 났다가 풀리는 것처럼 머리가 따끔따끔 거리기 시작했다. 아득해졌던 눈 앞이 점묘화처럼 시야에 잡혔다.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다음 날 학교에 가는 것이 처음으로 두려웠다.

씻고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면서 재린은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재린이 잘못한 게 전혀 없었다. 양심에 손을 얹고 1%의 잘못이라도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봐도, 재린의 잘못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일방적인 괴롭힘이었고, 일방적인 따돌림이었다.

계속해서 화가 났다. 그 아이들이 불행해졌으면 좋겠고, 고통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죽여야 하나 고민이 됐다.


요정 충신이 옆에서 기척을 냈다.

“왜. 공주는 사람 죽이고 싶다는 생각 하면 안돼?”

누군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마녀가 된 것만 같았다.


“더 한 것도 생각할 수 있어.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엄청 괴롭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이미 머릿속에선 재린은 그 아이들의 머리채를 잡고 몇 번이고 바닥으로 내던지고, 사물함에 박아버리고,

모든 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벌벌 떨며 잘못을 빌게 하고 있었다.




강훈은 서부초등학교 방송부였다. 3학년인가 반장선거에 나가고 싶어서 들어간 방송부였다.

당시 방송부는 꽤 공부를 잘 하고 리더십 있는 친구들이 들어가는 부서였다.

방송부 일은 꽤나 재밌었고, 마치 한 정당에 소속된 것만 같은 소속감과 다른 친구들과 달리

자신은 쉬는 시간마다 쉴 곳도 있고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는 우월감도 들었다.


방송부 일은 모두 재밌었지만 하나 단점이 있다면 위계질서가 엄격하다는 것이었다.

고작 한 학년 차이지만 선배가 들어오면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해야 했고, 간헐적으로 방송실에 집합하여 훈계를 들어야 했다.

그래도 전교행사가 있을 때면 방송실에서 여러 자막효과를 써서 자막을 송출하고, 앰프 볼륨을 조절하고

직접 아나운서가 되기도 하면서 중독성 있는 보람을 느꼈다.


그러다 강훈이 5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 수업이 끝나고 같은 방송부 친구들과 방송실에서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을 때였다.

6학년 여자 선배가 들어왔다.


"야 니네 다 방송실 불 끄고 무릎 꿇고 일렬로 앉아."

가끔씩 방송부 군기를 잡을 때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불을 끄고 모두 무릎을 꿇은 채로

일렬로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선배가 이러저러한 잡다한 이유로 훈계를 하곤 했었다.

강훈은 잘못 걸렸다는 생각을 하며 친구들과 일렬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6학년 여자선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졸업한 방송부 선배가 온 듯 했다.


"안녕~ 나 섭초 방송부였어~ 놀러왔어"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도대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 강훈의 궁금증을 해소해주 듯, 6학년 선배의 목소리가 다시 카랑거렸다.


"야, 현대중 다니시는 선배님이다. 인사해라."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강훈과 친구들은 고개를 숙인채로 쩌렁쩌렁 인사했다.

누구인지 모를 현대중을 다닌다는 방송부 선배와 6학년 선배는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강훈과 친구들 머리 위로 태극기봉을 든 채로 뛰며, 고개를 들면 봉에 머리를 맞게 된다느니,

눈을 뜨면 태극기봉으로 허벅지를 맞게 된다느니 폭력적인 언행을 하며 한참을 수다를 떨다 나갔다.


강훈이 현대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같은 방송부였던 친구는 한 명만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다.

여학생이었고, 다른 반이었는데 이따금씩 집 가는 길에 마주치면 데면데면 인사를 했다.

한 번은 그 친구가 하교 후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 서부초 정문 쪽에서 서 있기에 강훈이 다가갔다.


"아~ 오랜만에 방송부 놀러가려고."

집에 안 가냐고 묻는 강훈의 말에 그 친구는 방송부에 놀러간다고 말했다.

뭐하러 가냐, 아는 친구는 있냐 물어보니 친하게 지냈던 후배가 놀러오라고 해서 오랜만에

놀러간다는 답이 돌아왔다.


"야 너도 가서 막 똥군기 잡고 그러냐?"

킬킬 거리며 강훈이 슬쩍 물었고,

'야 걔네가 더 많은데 우르르 일어나서 나 패면 끝이야.'

그 친구도 손을 휘저으며 답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강훈은 생각에 잠겼다.

이미 졸업한 선배고, 잘못한 것도 없었고. 그저 강훈과 친구들이 함께 일어나서 이런 놀이 재미없다고.

조금만 반박했어도 군기문화는 바로 잡혔을 텐데, 그 땐 한 살 선배가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그저 계속 그렇게 지내왔던 방송부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고, 초등학교 교문을 나서면 바로 나오는

현대중학교, 현대고등학교 교문이 너무나 크게 느껴졌고, 그 곳에서 교복을 입고 나오는 선배들이

무서웠다.


그 당시 교문을 우르르 나오던 까만 교복의 중학생, 고등학생을 떠올려보다 문득 어렴풋이 그들의

왼쪽 가슴에 붙어있는 명찰이 떠올랐다.

진한 초록색의 명찰. 현대중학교 교복에도 붙어있었고, 현대고등학교 교복에도 붙어 있었다.

이미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직접 명찰을 보러 갈 수가 없었다.

[현대중학교 명찰]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했다. 남색, 초록색 다양한 명찰이 나왔다.

다만 플라스틱이 아닌, 박음질로 교복 위에 달린 명찰이었다.


[현대고등학교 명찰]

이젠 명찰을 잘 하고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쉽사리 명찰이 나오지 않았다.

학교에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현대고등학교 학생이 울산광역시 작문대회에 나가 수상을 했다는 기사였다.

수상 학생의 인터뷰 사진이 기사 메인에 떠 있었다. 학생의 왼쪽 가슴에는 플라스틱 명찰이 달려 있었다.

명찰 위쪽은 초록색이 칠해져 있고, 현대고등학교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강훈은 전화를 들었다. 현대고등학교에 전화를 했고, 이번주 중으로 조사를 가겠다고 했다.

10여년 전 실종된 학생이나 오랜 시간 결석한 학생이 있다면 조사가 필요하다는 말도 했다.

전화를 받은 당직 직원은 10년이 넘은 자료들은 확실하진 않지만 우선은 알겠다는 말을 남겼다.


초록색의 플라스틱 명찰은 다른 학교에도 여럿 있을 것이다.

다만 강훈의 촉이 달랐다. 현대고등학교일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왔고, 그 이유는 강훈이 10여년 전

그 고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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