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사실 나는 공주야.

염포산 미스터리-1

by Ann

그러니까, 사실 나는 공주야.

재린은 멍하니 빈 모니터 화면만 딸칵거리며 오후 회의에서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운 좋게 입사 2년 만에 팀장으로 진급하였으나 상장도 되지 않은 중소기업에서 팀장으로 승진 후 얻은 건

자리배치도를 원하는 대로 짤 수 있다는 것뿐이었고, 그마저도 햇빛이 들지 않는 창가자리를 사수한 게 전부였다.

재린은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눈으로 천천히 왼쪽 창가를 바라보았다.

창틀에 말라비틀어진 몸에 무릎은 튀어나오고 큰 포대자루를 몸에 두른 요정 하나가 다리를 흔들거리며 앉아있었다.


"오후에 회의가 있어. 2가지 정도 생각해 놓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적당히 튀지 않으면서 준비한 티는 났으면 좋겠는데."

재린은 그 요정에게 나직이 말했다.

요정은 재린만큼이나 공허한 눈빛으로 천천히 무릎을 짚고 일어나서는 느릿느릿 끄덕이며 창 밖으로 나갔다.

‘됐어. 오후 회의준비 끝!’

재린은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이제 요정이 재린의 뜻을 왕국에 전할 테고, 그 이후는 알아서 잘 흘러갈 것이다.

재린의 삶이 늘 그랬듯이.


재린이 자신이 공주라는 걸 깨달은 건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였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날, 친구와 하교하던 재린은 종종 놀러 가던 빌라의 옥상으로 갔고

우산을 내던지고 비를 맞으며 옥상 위를 뱅글뱅글 뛰어다녔다.

재린은 깔깔거리며 친구에게 소리쳤다.

"봐!! 신하들이 우리를 잡으려고 뛰어오고 있어!"

친구는 뒤를 흘끗 보고는 실감 나는 표정으로 외쳤다.

"신하가 아니야!! 악마 루탄이 쫓아오고 있어!!"

재린과 친구는 우산을 집어 들고 황급히 계단을 뛰어내려왔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

악마를 왕국으로부터 멀리 따돌려버리기로 했다.

그 길로 재린은 뛰어서 집으로, 친구는 뛰어서 자신의 집으로 갔다.

집으로 돌아온 후 재린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하고 개운함을 느꼈고 묘한 뿌듯함까지 느꼈다.

필히 악마를 쫓아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친구를 만나 재린은 귓속말로 속삭였다.

"우리가 악마를 물리친 것 같아."

친구는 입에 검지손가락을 대며 입모양으로 '쉿‘ 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악마를 봉인한 거야. 다시 얘기하면 악마는 다시 나타날 거야. "

그 후로 무슨 얘기냐며 친구들이 물어와도 재린과 친구는 한 왕국을 책임지는 공주로서

악마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그 후로 재린은 충실하게 공주 역할을 해왔다.

곤란한 일이 생기거나 선택을 해야 할 때 자신의 충신인 요정들이 나타났고, 재린은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전달했다.

그럼 그 요정충신들은 재린의 뜻을 왕국에 선포하고 모든 일 은 재린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이 날 오후 회의에서도 재린은 생각한 두 개의 아이디어 중 하나를 말했고, 다른 하나는 앞서 발표한 팀원과 겹쳐 굳이 말하지 않았다.

회의 결과는 적당히 실행 가능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팀원의 아이디어를 디벨롭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그날도 무난히 하루가 지났다.




강훈은 삐딱하게 의자에 기대어 뉴스기사를 보고 있었다.


[울산서 백골상태 시신 발견, 신원 확인 중]

'울산 동부경찰서에 따르면 11일 오전 8시 20분께 울산시 동구의 고등학교 뒤 야산에서 한 주민이 백골 상태의 변사체를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야, 정강훈 인마. 니 기사 여름방학 이후로 미뤄서 내라고 안 했나? "

강훈의 모니터 맞은편에서 공포탄 같은 분노가 날아온다.

강훈은 기사를 보던 자세 그대로 눈을 감았다가 숨을 내쉬며 눈을 뜸과 동시에 일어섰다.


“민원 우려된다고, 기사 낼 거면 여름방학 이후로 미루던가, 아님 학교이름 쓰지 말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야. 이씨.... 정신 안 차리나? 말 똑바로 안 전하나? 지금 이딴 식으로 기사 계속 올라오는데

이제 덮지도 몬 하고 니 우짤래? 어? 인마! 씨..... 우짤래? “


강훈은 눈을 내리 깔고 연회색 빛의 플라스틱 책상만 쳐다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일단은 요번 주말에 소나기 온다 칸 거랑 오늘 우박 날씨 기사로 덮으라 하겠습니다."

맞은편 팀장은 욕을 중얼거리며 나갔고, 강훈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형사과 2팀 자리의 전화기는 각 자리마다 울리고 있었고, 옆자리에서는 동료 진성이 이마를 짚은 채로 울산교육청과 통화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 그니까 신원 확인도 안 됐고, 저희들도 얘기해 드릴 게 없어요... 아니 그니까 저희가 뭘 해드릴 게 없다니까요...

아니 알죠... 그니까 저희는 다음 주 이후에 내라고... 아니 신원 확인 전에도 기사를 낼 수는 있는 건데 그걸 저희가...

아니 말을 자꾸 끊으시니까..."


강훈은 마른세수를 하며 밖의 흡연구역으로 바람이나 쐬러 나갈까 하다가

방금 전 따끈따끈한 분노의 불씨를 간직한 채 나간 팀장과 마주칠 확률이 99.9%이기에 조용히 다시 앉았다.


"씨발... 울고 싶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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