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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우카 Sep 18. 2020

맛있는 이야기 - 3

목포 조선 쫄복탕. 그리고 히라마쓰 요코

봄비가 내렸다.

2주간 재택근무로 방에만 있어야 하는 나와 달리 봄은 여전히 기지개를 켜고 달릴 준비를 한다. 지난주 보았던 도서관 담벼락 벚나무에도 잔뜩 봄기운에 간지럼을 느낀 꽃망울들이 간질거리는 몸을 잔뜩 부풀린다. 다행이다. 어쩌면 이 봄비로 부푼 몸의 열기가 조금은 식혀지지 않을까? 짧게 지나가버릴 아쉬운 봄을 조금은 내 옆에 잡아두고 싶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은근히 끓여 오랫동안 온기를 전해줄 국물이 그립다. 첫 술은 입술을 델까 염려함으로 호호 불어 조심조심 입으로 가져가야 하지만 어느새 뜨거워진 열기를 받은 숟가락질이 속도를 올리고 마지막 바닥을 긁을 때에는 아쉬움으로 숟가락 든 손이 힘을 잃게 되는 “탕”.

남편에게 바람을 넣는다. 재택근무를 권할 만큼 바깥출입을 삼가야 할 때이지만 “쫄복탕”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서른마흔다섯 가지 이유를 늘어놓고 차에 시동을 건다. 근대화거리를 돌아 항구에 접한 쫄복탕 집에 도착했다. 음식의 깊은 맛을 알 나이가 아니고서는 결코 들어서지 않을 낡고 허름한 가게다. 메뉴도 쫄복 하나다. 지리로 할지 탕으로 할지 그 선택만 하면 된다.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다.”라는 단일품목과 주방장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는 인테리어의 무심함은 오래된 건물 곳곳에 숨어 있다. 이런 집에 앉게 되면 왠지 모르게 겸손해진다. 켜켜이 시간이 쌓아놓은 묵직함들이 가볍고 화려한 것에 치중하는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충고가 가슴에 느껴지는 까닭일 것이다.

바다의 쇠고기라 불리는 쫄복. 복어의 한 가지인 쫄복은 졸복아지, 복쟁이, 졸복, 쫄복으로 부른다. 몸은 25cm 정도로 작다. 작다고 해서 복어 특유의 독성이 없을까? 아니다. 난소와 간장에는 강한 독이 있고, 근육과 정소에는 약한 독이 있다. 그런 까닭에 탕 한 그릇을 끓여내기 위해 세심한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끓여놓으면 지극히 소박한데 그 이면에는 독을 제거하는 화려한 칼놀림이 담기게 된다. 쫄복은 탕으로도 지리로도 맛이 뛰어나다. 순수한 담백함이 비리지 않고 함께 넣어 먹는 미나리나 콩나물로 인해 더욱 시원한 맛을 느끼게 된다. 오늘의 선택은 지리가 아닌 탕이다. 주인장은 거친 손으로 무심히 탕을 내려놓으며 부추무침을 넣어 먹으라 권한다. 탕은 지리에 비해 국물이 탁하다. 그 희멀건한 탁한 국물이 빨갛게 물든다. 빨갛고 탁한 국물 이건만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입에서 나오는 첫마디는 “시원하다”이다. 두세 번 연거푸 입으로 가져간다. 뜨겁다. 시원하다. 뜨겁다. 맛있다. 이어지는 탄성이 잦아들 즈음에야 탕 속을 들여다본다. 25cm의 작은 고기를 삶아 국물을 밭쳐내고 몸살을 바른다. 나머지는 엉성한 채로 받쳐 거친 뼈는 골라내고 다시금 끓여낸다. 여간 손이 가는 음식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탕 한 그릇에는 쫄복이 들려주는 바다의 이야기와 만든 이의 손길에 묻어난 인생의 이야기가 담겨 먹는 이의 마음을 잡는다. 따뜻하다. 탕의 온기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가 온몸을 따뜻하게 한다. 두꺼운 뚝배기의 밑이 보인다. 아쉽지만 여행을 끝내야 한다. 어느새 내리던 비가 그쳐 있다.


마음이 보송해진다. 이런 날에는 “히라마쓰 요코”가 떠오른다. 그녀는 무심히 스쳐 지나갈 일상에서 길어낸 소재로 생명력 입힌 글을 쓰는 작가다. 그녀는 식문화와 문학이라는 새로운 범주로 맛과 사람을 잇는 일을 한다. 특히 그녀의 책에 소개된 한국의 식문화는 자국인이 보기에도 놀라운 만큼 애정이 깃들어 있다. 오늘 내 손에 들려진 책은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 / 바다출판사>이다. 이 책은 그녀가 추구하는 작품세계를 한눈에 보여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식기(食器),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의 식문화(食文化) 사람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가 단락단락 나누어 소개된다. 더없이 고마운 것은 이 책에 소개된 음식들의 레시피가 부록으로 소개되어진다는 거다. 요코의 눈에 비치는 먹는다는 것, 밥을 짓는다는 것은 그냥 그대로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거룩한 ‘의식’이 된다. 마음을 드리고 편안함을 거부하고 수고로움을 사서 한다.


“스스로 밥을 짓자. 스위치에 맡기지 않고 불을 조절해 맛을 만들어 가면서 따끈따끈하게 밥을 짓고 싶다. 그런 단호한 생각이 들었다. p95”


그녀는 전자레인지를 버리고 전기밥솥을 버리고 문화 냄비와 돌솥으로 밥을 한다. 거듭되는 실패 속에 불을 다스리는 기술을 몸에 익히고 솥을 길들여 밥알 하나하나가 살아 서 있는 건강한 밥을 지어낸다. 어디 그뿐이랴. 맛을 위해 염전을 찾고 맛의 기본이 되는 맛국물을 만들어 낸다. 재료의 고유한 맛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그에 맞는 그릇을 찾는다.
각 나라마다 부엌문화가 다르고 음식이 다르다. 그녀는 그 나라 그 지역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향토음식을 먹는다. 그 음식을 통해 담을 허물고 경계를 넘어선다. 음식을 섭취하는 사람들의 정서와 몸을 이루는 일부분을 나누어 갖는다.


“두꺼운 한 조각을 덥석 먹는다. 깨문다. 오도독오도독 식감 있는 살과 연골 속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는 무언가. 어두운 구멍을 계속 파 나가듯 계속해 오독오독 깨문다. 난생처음인 무언가. 그것은 순식간에 입속을 화 하며 채우고 이어서 비강에 직격탄을 쏜 후 단번에 수천 개의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정수리를 찡 하고 찔렀다. p145”


무슨 음식을 먹고 표현한 것일까? 바로 홍어다. 한국인들에게도 호불호가 확실한 홍어. 나도 암모니아 향에 대한 거부감으로 일절 입에 되지 않는다. 그런 음식까지도 요코는 먹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음식을 통해 담을 허물고 경계를 넘어선다. 음식을 섭취하는 사람들의 정서와 몸을 이루는 일부분을 나누어 갖는다. 이런 그녀도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에 빠질 때가 있다. 같은 여자로서 얼마나 다행인가? 일을 잘하거나 못하거나 요리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누구나 다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녀는 애써 움직이거나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먹는 데 신경도 에너지도 쓰지 않으면서 컨디션을 회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냥 조심조심 그 시간이 지나도록 내버려 둔다. p212”


멀리 뛰기 위해 잔뜩 몸을 웅크린 개구리처럼 그냥 시간의 지남을 온몸으로 느끼고 온 자연 만물로부터 에너지를 조용히 빨아드리는 것. 그리고는 단 것을 먹는 즐거움으로 기력을 되살려나간다. 이 모든 지혜가 담겨 있는 아주 좋은 책. <한밤중에 잼을 졸이다>이다. 이렇게 비가 오고 따뜻한 음식으로 부른 배를 방바닥에 붙이고 요코의 책을 읽는 것. 충분하다. 이 하루의 행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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