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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우카 Sep 18. 2020

볕뉘

에세이 -1

볕뉘(日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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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 깨다를 반복 하다 열린 눈꺼풀 사이로 그녀를 본 듯하다. 아마도 기억하지 못한 지난밤의 꿈이 그녀와의 이야기였다는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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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은 백 옥자. 1950년 경상남도 유천 생(生). 1993년 간암으로 사망. 1남 7녀 중 맏딸.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고, 그렇게 기구할 것도 없는,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듯 그녀 역시 모든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척박함과 빈 함의 절정기를 살아낸 평범한 이 땅의 어머니입니다. 비록 그녀의 태(胎)를 빌어 태어난 생명은 없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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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2000년 상동으로 이름이 바뀐 유천 역 - 그때 역시 모든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이었습니다. - 간간이 서는 느린 기차에서 내려 유천 강을 가로지르는 나지막한 다리를 건너 한 시간 남짓 들어간 두메산골 출신인 셈이죠. 유천 강을 지나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은 지루한 풍경의 연속입니다. 한가로움이나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노동의 곤함이 묻어나는 반복. 구별이 가지 않는 풍경으로 인해, 걷고 있는 그 길이 어디즘인지도 알 수 없어서, 길어지는 그림자의 길이를 보면서, 혹은 짧아지는 그림자의 길이를 보면서 집이 가까워 옴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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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일을 겪은 때라 생명이 귀한 그 시절, 많은 자식들은 고달픔 속에서도 종족번식의 영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딸이 일곱, 아들 하나. 그녀의 어머니는 겨우 소박(疏薄)은 면했지만 줄줄이 딸린 입들에 풀칠하는 일은 몇 마지기 밭으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나 봅니다. 부산으로 오가는 뚜쟁이 아줌마 손에 이끌려 그녀가 유천 강을 건너게 된 것은 정확히 언제인지 모릅니다. 그녀는 동생들을 책임지고 뒷바라지해주며, 넉넉한 밭떼기를 약속하는 부잣집 재처자리로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는 배가 다른 아이 넷과 작은 체구에 고집 센 어머님이 계셨지만. 집안일은 식모가 담당했고, 때때로 집안 대소사만 챙기면 되었습니다. 그녀는 얼굴을 곱게 단장하고 때에 맞추어 부부동반 모임에 동행하거나 아이들의 학교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체면이 중요했던 남편은 성실하게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해주었고, 때때로 바람을 피우거나 손찌검을 할 때도, 그때만 견디면 여동생의 일식집도, 남동생의 대학 등록금도 든든히 보장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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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녀를 만난 것은 7살 때입니다. 아버지의 정실부인 그러니까 큰오빠의 어머니께서 집을 나간 그 어느 날,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현관문에 서 있었습니다. 참으로 어색한 첫 대면이었지만, 곱게 생긴 그 얼굴이 늘 무서운 얼굴만 하던 큰오빠의 어머니보다 좋게 느껴졌습니다. 엄마를 떠나 아버지 손에 이끌려오게 된 한국. 배다른 형제들과의 사이에서 무섭도록 외로웠던 저로서는 그녀의 품이 쉴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나 저나 어디선가 ‘날아온 돌’이었고 박힌 돌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자기 자식을 낳아보지 않은 처녀 가슴의 그녀는 그런 제가 부담스러웠나 봅니다. 때로는 친절했지만 때로는 그녀의 울음을, 때로는 그녀의 고통을 폭우(暴雨)처럼 온몸으로 견뎌내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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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의 특별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워낙 성품이 고요했고 장식품처럼 살아감이 약속되었던 그녀는 늘 있는 배경처럼 존재했습니다. 다만 한 번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화장대가 좋았습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 즘 그렇듯 저는 그녀의 화장품으로 눈두덩이는 파랗게, 입술은 빨갛게, 그리고 그녀가 아끼는 반지를 손가락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굽 높은 뾰족구두를 신고 한 손으로 양산을 들고 위태한 걸음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다 그만 그녀의 반지를 하수구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저의 뒤뚱거리며 걷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꺄르륵거리던 그녀의 얼굴은 일순 이지러지며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당황함을 내뿜었습니다. “그 반지만은 안돼.” 그녀의 외마디 말은 그녀가 제정신인가 할 만큼 하수구를 파헤치는 손 움직임에 가려졌습니다. 그녀의 간절함 탓인지 반지는 온갖 오물을 뒤집어쓴 채로 그녀의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반지는 보라색에 흰 줄이 그어진 것으로 빛의 온도에 따라 흰 줄이 선명해지며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거나 사라지는 신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께로 받은 다이아, 진주, 루비, 사파이어보다 그 반지가 그렇게 좋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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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는 빠른 성장을 했고 그녀는 그렇게 그녀의 삶을 살았습니다. 일본에서 대학생활을 할 때, 그녀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43살. 지금의 제 나이에도 못 미치는 삶을 살다 간 것이지요. 그녀가 생을 마치고 난 뒤 그녀의 짐을 정리하면서 저는 보라색 반지를 챙겼습니다. 어린 시절 그녀와의 추억이 새삼스러웠다기보다는 그녀가 어느 보석보다 귀히 여긴 것만큼 저는 그 반지가 최고의 보석일 거라는 속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학기 중 장례였던 까닭에 저는 마지막 49제에나 다시 참석할 수 있었고 저는 그날 그 보라색 반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반지를 본 그녀의 막내 동생은 그 보라색 반지가 내 아버지가 그녀를 처음 만나러 갔을 때 준 반지. 즉 아버지가 그녀에게 청혼을 할 때 준 반지라는 것을 일러주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불쌍히 여기기도 하고 때로는 경멸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자식 한 명 없이 돈에 팔린 삶. 또 다른 이름으로 새장 안에 갇힌 삶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보는듯한 두려움에 그녀를 성장에 따라 멀리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그렇게 슬프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내 삶을 차지한 부분이 적었다기보다. 어쩌면 그녀의 삶이 그러했듯 내게도 그녀는 철마다 거실에 바꾼 커튼처럼 배경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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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변함없이 흘러갔고 삶의 굴곡을 지날 어느 즈음, 돈이 급해진 때가 있었습니다. 처분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처분하면서 저는 그 보라색 반지까지 내어놓았습니다. 아버지가 해준 여러 폐물 가운데 그녀가 유독 아낀 것이니 제법 값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보라색 반지는 싸구려 루비보다도 못한 헐값이었고 백금이라고 생각한 것도 백금이 아닌 멕기. 돈으로 바꿀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참 허망한 꼴이 되었습니다. 헛헛한 웃음으로 무안함을 감추며 ‘ 그래 두메산골 촌사람이 뭘 알겠어.’라고 자위하며 보석 상회를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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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가 살아간 삶만큼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녀와 그녀의 보라색 반지를 떠 올려보니 그것은 단순한 반지가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그녀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외로움과 수욕의 시간을 견디게 한 것은 그녀의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한 인내가 아니라, 부모님을 위한 밭떼기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한 남자를 사랑한 한 여자의 사랑이 견디게 한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처음부터 아버지를 사랑한 것인지, 살을 맞대고 살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인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두메산골 그 순박한 첫 가슴으로 아버지를 만났고, 아버지가 만들어준 그 우주 속에서 그녀의 삶을 힘 있게 살아냈던 것입니다. 비싼 금은보석에 둘러싸인 삶 속에서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멕기 보라색 반지. 그것이 그녀의 사랑이고 순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 짧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는지 모르지만 오늘도 늙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로 그녀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사랑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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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니 나이가 되면 상아 세아도 너의 삶을 이해할 거야." 잠에서 깨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그녀의 나이만큼 여자의 삶을 살고 보니 이제야 그녀의 삶이 눈에 들어오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엄마 내가  더 일찍 엄마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조금은 엄마를 외롭지 않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엄마 미안해요. 그리고 키워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오늘 이 말이 그녀에게 닿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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