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하게 시험 보고 들어오는 공채로 하셔야죠. 경채로 해야만 하는 이유가 딱히 없잖아요?"
"요새 공채 뽑으면 여자들이 시험을 잘 봐서 여자가 들어오잖아. 경채는 남자 뽑을 수 있으니까 경채로 해야지."
"여자 뽑아서 안될 게 뭐 있어요? 남직원이고 여직원이고 일 똑같이 하는데요?"
"똑똑한 여자는 필요 없어. 그리고 여자 뽑아놔 봐. 나중에 결혼하고 애 낳고 육아휴직 써야 한다 그러지 근무하는 중에도 애 학교 행사라고 조퇴하지 요새는 뭐 모성보호시간? 그거라면서 일찍 퇴근하지. 아주 못 써. 남자 뽑아야지 그런 일 없지."
나는 과장이 이 말을 할 때마다 어이가 없다. 우리 과에서는 아직 여직원이 육아휴직을 한 사례는 없었고 오히려 남직원들만 계속 돌아가면서 육아휴직을 해 왔기 때문이다.여직원들은 행여나 자신이 육아에 대한 배려를 요구하면 여자는 이래서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 그리고 그것이 본인뿐 아니라 다른 여직원들에게도 해가 될까 봐 일부러 더 나라에서 만들어놓은 제도를 사용하지 못했고 반면 남직원들은 그런 제도를 거리낌 없이 사용해왔다. 부인이 일을 하지 않는 남자 직원도 아이는 같이 키워야 한다며 육아휴직을 썼고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거나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것도 부인은 이럴 때라도 쉬어야 한다며 남직원들이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과장은 채용시즌만 다가오면 여직원은 사용한 적도 없는 육아휴직 등의 핑계를 대며 공채는 여자가 뽑혀서 하면 안 되고 경채를 통해 남자를 뽑아야 한다는 연설을 늘어놓는다.
공무원 경채는 공채와 달리 공고기간이 짧고 시험을 보지 않고 봐도 간략하게만 본다. 또한 면접도 인성면접 정도만 보기 때문에 채용절차가 간단해서 채용공고 후 3개월 정도면 인력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경력이 있다고 해서 현장에 바로 투입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공무원 업무에 있어서는 신입과 같아서 교육하는 데에도 신입과 같은 시간이 걸리고 사회생활을 해 봤으니 눈치라도 빨라서 조직에 빨리 적응할 것 같지만 그런 눈치가 있었다면 왜 사기업을 계속 못 다니고 공무원 경채로 들어왔겠나 하는 말이 돌만큼 업무체계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기존 공무원들을 무시하며 충돌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았다.
차라리 경력이 있어도 공무원 수험생들과 같이 시험공부를 하며 내려놓을 것을 내려놓고 간절함을 가지고 어렵게 공부해서 들어온 공채 출신들은 그 정도의 학습능력이 있기에 업무에도 빠르게 적응했고 힘든 수험생활을 겪었기에 기존 공무원들을 무시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력이 부족해 빠른 인력 투입을 위해 경채를 해야 한다거나, 사회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업무능력이 더 빠르게 오르기 때문에 경채를 채용한다고 해도 이해할까 말까 한 마당에 여자가 뽑히지 않게 하기 위해 경채라니.
작년에도 이 이야기를 여직원들 들으라고 여직원들이 있는 데서 하기에 여직원들이 '왜 굳이 남자를 뽑으려고 하시냐,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똑똑한 사람 들어오면 좋은 것 아니냐'라고 했더니 과장은 '똑똑한 여자는 필요 없다. 그리고 공채는 여자가 들어올 확률이 더 높은데도 기어이 공채를 고집하는 건 여자만 뽑혔으면 좋겠다는 거냐, 그게 남녀차별이다. 여직원들이 여자 뽑히게 하려고 너무하는 것 아니냐'며 억지를 부렸다.
그 말에 어이가 없었던 한 여직원이 '공정하게 시험 봐서 붙는 게 왜 남녀차별이냐, 막말로 경채로 멍청한 남자 들어오는 것보다 공채로 똑똑한 여자 들어오는 게 낫지 뭘 그러냐. 경채 뽑아서 제대로 된 사람 들어온 적 없지 않냐'라고 했더니 과장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져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 간부들 술자리가 있었고 그 자리에 여직원은 1명만 참석했었다. 과장은 그 여직원을 향해서 다른 간부들이 듣도록 큰 소리로 '얘랑 다른 여자애들이 아까 우리들 똥통이라고 싸잡아서 욕했다, 우리 조직은 기술직 공채가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금 5급 이상은 기능직 출신들인데 경채를 멍청한 남자 들어오는 거라 한 건 지금 간부들이 기능직 출신인 것까지 싸잡아서 욕한 거다, 이래서 여직원들은 안된다, 아주 싸가지가 없다.'라고 화를 냈다. 그 여직원은 마지막 말을 꺼낸 직원이 아니었음에도 그날 과장이 하는 모든 여직원들을 향한 욕의 대상이 되었다.
그 다음날 타깃이 되었던 여직원이 우리를 불러놓고 그 말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확장이 되는지 모르겠다며 과장이 뭐라 하든 여자인 우리는 그냥 대꾸를 하면 안 될 것 같다며 한숨을 쉬는데 정말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 다시 채용시즌이 왔고 과장은 공채는 여자가 들어오니 경채로 남자를 뽑아야 한다는 얘기를 나에게 직접적으로 했다. 대체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길 바라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과장의 저급한 농담을 받아준 것도, 과장이 직원들에게 외면받을 때 챙겨준 것도, 밤이고 주말이고 나와서 일을 한 것도 나였는데, 여직원들을 뽑아봐야 쓸모가 없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니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남자가 들어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지방 출장을 가는 것도 남직원은 애가 어려서 못 간다고 하며 가지 않고, 그 남직원과 같은 나이의 아이를 키우는 여직원이 대신 가는 우리 과에서 여자는 가정 핑계 대서 안된다는 건 대체 누굴 보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과장이 남자를 뽑아야 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일 년 내내 '여자라서', '여직원이니까' 같은 말을 듣지 않으려 죽기 살기로 일해봐야 내가 누리지도 못한 제도로 인해 쓸모없다는 평을 받을 거면 뭐하러 열심히 일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할 거 다 해보고 욕을 먹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또 과장이 똑똑한 여자는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내가 왜 여기 있나 싶다. 멍청해서 어려운 일은 못하고 아침에 커피나 잘 타 드리고 술자리에서 웃으며 술이나 따라줄 줄 아는 여자가 필요해서 여직원을 뽑은 거라면 큰 사업이라도 맡기지 말든가.
이런 말들을 들을수록 그래도 내가 더 잘해서 인식을 바꾸겠다는 다짐이 강해지길 바라지만 반대로 그 다짐은 희미해지고 가끔은 정말 다 포기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 어차피 이런 인식이라면 아무리 내가 일을 잘해도 남자 직원이 남자라는 이유로 간부가 될 거 그냥 나는 원하시는 여성상이 되어 일 안 하고 세금이나 축내는 말년 6급 공무원으로 사는 것이 정답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일단은 그 순간들을 가까스로 털어내며 버티고 있지만, 내 존재가 이런 식으로 부정당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 스스로도 나의 가치를 부정하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