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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womanB Jul 19. 2019

간식시간

손은 없고 입만 있는 사람들

초복이다. 높으신 분께서 직원들에게 수박을 내려주셨다.
과장은 신이 났다. "그럼 수박만 먹을 수 없으니 빵도 좀 사고, 이것저것 사서 간식을 하자."


 과장이 이 사무실에 온 뒤로 3년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간은 간식 시간이었다. 간식을 준비하라는 말은 곧 '너가 회의실도 치우고, 신문지도 깔고, 20여 명이 불만 없이 잘 먹을 간식도 알아서 사 오고, 사 와서 씻고 세팅하고, 끝나고 설거지랑 쓰레기 버리는 거랑 테이블 닦는 거 다 해.'라는 뜻이었으니까. 또한 직원들이 억지로 먹는 걸 보며 좋아하는 과장의 취미생활을 혼자 견뎌야 했으니까.


 이제까지는 사실 잘 참았다. 군말 없이 준비를 했고, 손하나 까딱 안 하던 직원들이 "간식 드세요."라고 말하면 뭉그적뭉그적 자리에서 나오는 상황들을 그저 지켜봤다. 오기 싫다고 버티다가 과장, 계장이 자리에 앉아서 직원들 다 어디 갔냐고 큰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나는 더 굽신거리며 제발 와주세요 라고 이야기해야 하고, 그제야 제대로 움직이는 상황들을 참아왔다. 그래, 내가 막내니까. 이들의 문화가 모든 게 막내가 다 하는 문화라면 따라야 하겠지,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제일 적으니까.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이 그들이 하는 일보다 많아지고, 막내를 벗어나고 나서도 나는 간식 준비를 맡아해야 했다. 내가 들어오자마자 직원들은 당연하다는 듯 나에게 준비를 시키기 시작했었는데 내 뒤에 들어온 남자 직원들은 이런 일에서 자유로운 것을 보고 의문이 들었다. 왜,  해야 하지?


 그 이후로" 좀 도와주세요, 준비 좀 같이 해주세요."라고 말했지만 이들은 "어, 잠깐만."이라고 이야기하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온 수박 두 통. 과장은 수박과 함께 간식을 하자고 하, 나는 이걸 자르고 세팅하고 간식까 사야 한다는 게 막막했다. 게다가 나는 어디 식당에서 나오는 수박도 먹지 않을 만큼 수박을 좋아하지 않고, 혼자 사는데 굳이 수박을 살 일도 없어서 이 가공 전의 큰 통을 직접 잘라볼 일이 없었다. 그래서 간식 공지를 올리며 추가로 도움을 구했다.

 "죄송하지만, 수박 자르실 줄 아는 분들 이따가 수박 자르는 거 좀 도와세요."

읽씹이 계속되는 가운데 한 남 직원은 "?" 하나를 남겼다.

 "제가 자를 줄 몰라서요, 잘라본 적이 없어요"

 "자를 줄 모른다는 게 무슨 말이야?"

 내가 말을 애매하게 했나. 아님 그런 거에 알고 모르는 게 어딨냐 알아서 해라 라고 하는 건가.


 아니 내 말을 이해를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혼자 수박 2통을 자르고 추가로 20인분의 간식도 알아서 준비하라고 두는 건 무슨 조직 문화지, 그냥 내가 도와줄게 하면 병이라도 나나.


 "제가 큰 것 한통을 잘라본 적이 없어요, 근데 괜히 해보겠다고 큰 칼로 덤비기는 좀 겁이 나서요."

 그렇게 설명을 했지만 이해가 안 된다고 한 그 직원도 결국 다시 읽씹. 다들 그냥 너가 해라 다 큰 애가 뭐 그거 못 자른다고 도와달라는 거냐의 뜻이었으려나. 정말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혼자 어떻게든 해야지 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평소에 자기가 얼마나 가정적이고 집안일을 잘하고를 자랑하던 직원분들 다 어디 가셨나.' 하는 어이없음은 막을 길이 없었다.


 시간이 조금 흘렀고 다행히 다른 두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중 한 직원은 사실 수박 자를 줄을 모르는도 도와주겠다고 일단 와 준 것에 얼마나 감동을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준비하고 간식을 사 오고 나니 과장이 하는 말은 " 왜 이렇게 적게 사 왔어, 직원들 양을 몰라?"였다.

'직원들 양은 3년간 시킨 과장님보다 3년간 준비해 온 제가 더 잘 알죠.'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늘 더 많은 것이 수북이 쌓여 있길 바라는 과장은 간식시간마다 나에게 핀잔을 준다. 이젠 그냥 알람 같기도 하다.


 그렇게 핀잔을 받은 그날도 역시나 간식은 남았다. 예의를 차리느라 배려하느라 남긴 것이 아닌 더 먹으라고 권해도 더 이상 못 먹겠다고 하는 수준으로 남았다.

 

 읽씹의 여운과, 과장의 핀잔 여운 덕에 더 이상 남아있기 싫었다. 뭐 치우는 건 알아서 치우라지 하고 중간에 회의실을 나와버렸다. 그리고 다른 과 직원을 만나러 갔다. 이 상황을 아는 그는 차려주는 것도 하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했다. 다녀오니 그래도 치워져는 있더라.



 사실 그게 치워져 있었던 이유는 이 선배라고 하는 직원들이 움직였기 때문이 아니라 기간제 근로자분이 설거지를 했기 때문이라는 게, 내가 맘을 놓고 회의실을 나와버릴 수 있었던 것도 내심 그분이 하시겠지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게 이 조직의 결코 바뀌지 않을, 나도 물들어버린 군대꼰대문화를 너무 잘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싫다. 어떤 시도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자리를 뜨는 것이 그저 안 하고 버티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또 다른 희생양이 생길 것은 뻔하다. 그런 식으로 '나만 아니면 돼.'를 원하는 것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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