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이 가고 계장이 왔다
그는 40대 후반의 계장이다. 나는 그가 우리 계의 계장으로 온다고 했을 때 젊은 사람이니까, 말이 통하겠지 싶었다. 그가 직원들을 모아놓고 서로 배려하면서 잘 지내보자고 했을 때, 뭔가 변하려나 했다. 하지만 웬걸, 그는 50대 후반이었던 이전 계장보다 더 불통의 사람이었다.
계장은 크고 중요하다 싶은 일에는 업무분장을 무시하고 무조건 남직원을 불렀다. 워낙 남녀차별이 심한 부서에서 보고 자란 것이 그거니 어쩌겠나 싶다가도 같은 주무관일 때에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만들어 놓은 자료들을 자잘한 것까지 다 얻어가던 그가 계장이 되고 나서 내가 올리는 계획안과 발주안을 모두 무시하면서 내가 일하는 방식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가 계장이 된 지 두어 달쯤 지났을까, 그는 일요일 오후 3시만 되면 직원들에게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월요일 회의에서 보고할 주간보고 내용을 알려달라는 것. 그 카톡이 오면 직원들만의 카톡방은 쉴 새 없이 울렸다. '어이없다. 일주일 내내 우리가 진행사항, 예정사항 보고하는 거 받아 적었으면 그걸 정리하는 건 본인이 해야지 일요일에까지 문자 해서 다시 알려달라는 건 뭐야.', '본인이 주말에도 일 생각한다고 우리까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길래 업무시간 외 카톡을 이렇게 당연하게 계속 보낼 수 있지?'...
계장의 카톡에 대답해주는 것은 간단했지만, 그 간단한 걸 대답해주기 전에 스트레스를 받는 시간이 더 길었다. 다른 일을 하느라 답을 못하면 끈질기게 카톡이 왔다. 월요일 아침 보고사항이 굳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물어야 하는 내용일까 싶었다. 이제까지 어떤 계장도 월요일 아침 회의 내용을 스스로 정리를 못해서 주말에 연락을 하는 경우는 없었기에 다들 당황스러워했다.
계장은 회사를 위해 모든 시간을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해당 부서와 협의만 잘 되면 주중에 해도 되는 공사임에도 그렇게 협의를 하면 그 부서에서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며 묻지 말고 무조건 주말에 하라고 했고, 비어있는 방도 주말에 공사하길 선호했다. 계장에게 연휴는 곧 공사를 할 수 있는 날이었다. 본인이 감독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업체와 주무관은 연휴 일정을 모두 빼놓고 대기하다가 본인이 공사를 하라고 하면 하는 사람이라는 식의 인식이었다.
한 번은 근로자의 날이 낀 연휴에 공사를 시키라고 하기에 '근로자의 날은 법적으로 쉬는 날이다. 다른 날은 몰라도 이날은 안된다. 사진이라도 찍어서 고발하면 바로 벌금이다.'라고 이야기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나 때는 그런 거 없었어. 업체가 괜히 쉬고 싶어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왜 못 시켜?"였다.
하나, 그때는 10년 전이니까 그랬겠죠. 둘, 업체 사장도 근로자도 사람인데 연휴에 쉬고 싶으면 안 돼요? 셋, 연휴 끝나고 주중에 해도 충분한 일정인데 굳이 연휴에 당겨서 할 필요가 없지 않나요. 넷, 이렇게 근로자의 날에 밀어붙이시는 건 갑질이에요.
이 네 가지 하고 싶은 말 중 겨우겨우 세 번째 것을 골라 이야기했다. 내가 계장 때문에 근로자들에게 갑질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십여분 간의 실랑이 끝에 결국 계장은 알겠다고 했지만 그 뒤에 한 직원이 나를 불러내었다.
"야, 그냥 좀 알겠다고 하고 맞춰드리면 안 되냐? 결국엔 안되게 되더라도 업체한테 전화하는 시늉이라도 한번 더 해 보고 안된다고 하면 될 거 아니야."
"왜요? 업체에서 못한다고 했고, 한번 더 전화해봐야 어차피 안 되는 거고, 이게 그렇게 시급한 것도 아닌데 왜요? 그렇게 급한 거면 제가 알아서 업체 타일렀겠죠. 그렇게 급하게 떼쓸 일이 아니니까 제가 안 하는 거죠."
"그래도 계장이잖아. 내가 하는 말 무슨 뜻인지 이해 못해?"
"이해 못하는 것 아닌데, 그래도 저는 그런 식으로 대응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른 날도 아니고 근로자의 날이에요. 공무원이 근로자의 날에 근로자들한테 일하라고 억지 부리는 거 그거 인권문제예요. 다른 날이었으면 저거 또 주무관 연휴 생각 안 하고 부려먹는다고 속으론 욕하면서도 일 했겠죠. 근데 이건 사안이 달라요. 계장님도 그 정도는 인지하셔야 하고요."
"어휴. 그래 니 맘대로 해라. 그래도 너무 각 세우진 마. 저번 과장이랑 그랬던 것처럼 이번 계장이랑도 괜히 대치하는 거 같아서 그래."
과장이 날 희롱했던 것을 아는 사람이 하는 발언치곤 참 서운했다. '나를 희롱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게 그렇게 잘못이었던가. 그 자리에서 동료를 지켜주진 못할망정 방관을 했으면 그 후 나의 대처방법에 대한 평가도 말아야지, 나를 상사랑 잘 대치하는 사람으로 모는구나. 내가 올곧게 일하려고 하는 노력을 이 사람은 그저 상사와 쓸데없이 싸우는 거로만 생각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날 하루도 참 우울했었다.
그래도 그 뒤로 나는 '그래, 그래도 상사니까. 겉으로 충돌해봐야 그 직원처럼 생각하는 사람만 늘어나겠지.'라는 생각으로 최대한 각을 세우지 않으려 노력했다. 과에 배정받은 지 얼마 안 된 신입직원들이 주무관님은 어떻게 저 사람한테 그렇게 잘할 수 있냐고 의아해할 정도로.
내가 그런 마음을 먹은 한편에는 '이렇게 잘 맞춰주고 관계를 잘 쌓아가다 보면 이 사람도 내 말을 조금은 듣고 이해해주겠지.' 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계장은 생각보다 더 권위적이었고 이상하리만치 자격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계장이 하는 말은 모두 명령과 통보였고 자신의 말이 옳다는 반응이 나와야 대화가 끝나는 식의 회의가 계속되었다. 계장의 이러한 성향을 알게 하는 사건은 계속 발생했고 그때마다 나는 계장에 대한 상사로서의 기대와 인간으로서의 기대를 모두 내려놓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