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선배가 자꾸만 손을 잡아요. 밤늦게 전화를 해요. 밥 사줄 테니까 저녁 먹자고 자꾸 시간 언제 되냐고 묻는데 그게 좋은 의도가 아닌 거 같아요. 제가 그러지 말아 달라고 선을 그었어요. 그런데 그 뒤부터 제가 뭐만 하면 소리를 지르고 XX년, XXX년이라고 욕을 해요. 근데 사람들이 그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거로 저한테 소리 지르는 걸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안 말리고 그냥 자기 일들을 하더라고요. 계장님은 '당사자끼리 알아서 풀어.'라고 하고 말아요.
그 후배는 결국 퇴사를 했다. 공무원이 퇴사를 한다는 것. 그건 굉장히 큰 이슈였다.
사람들은 나에게 그 직원이 퇴사한 이유를 물었다.
"왜 나간 거래? 둘이 친했으니까 알 거 아니야."
"그냥, 안 맞는대요."
"안 맞는다고 나가? 어디든 비슷할 텐데. 너네도 잘 들어. 내가 보기엔 여기만한 곳 없어. 덩달아 흔들리지 말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직원을 품평하는 것을 나는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배를 나가게 한 사람은 사실 유명했다. 분노조절장애. 툭하면 욕부터 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그냥 성질 더러우니 알아서 건드리지 말자.'였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철이 없어도 겨우 사람 하나 성질 더러운 것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는 바보는 아니다.
"그냥 사람이 못된 거면 저도 참을 수 있었겠죠. 저도 사회경험 있고 어딜 가나 또라이들 있는 거 충분히 아니까. 근데, 50넘은 아저씨가 자꾸 가까이 와서 만지고 데이트하자고 하는 건 별개의 문제잖아요. 그냥 조용히 퇴사할래요. 선배님도 누가 물으면 그냥 안 맞아서 나갔다고 해주세요."
그 전에도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들렸었다. "그 선배 진짜, 나 입사 초에 한 3년간 그렇게 나만 보면 볼을 만지더라. 그냥 화장 지워진다고 돌려 얘기하면서 피했지 뭐.", "그 주무관님 저한테 번호 알려달라고 하더니 자꾸 저녁에 전화해서 시간 언제 되냐고 코치코치 캐물어요. 마주치기 싫어서 일부러 피해 다니잖아요."
한 남자 주무관은 내가 과장의 희롱에 힘들어할 때"여자들은 왜 당당하게 말을 못 해? 그냥 싫다. 그러지 마라. 말하면 되잖아. 왜 그걸 알아서 해결을 못하고 힘들어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말해."라며 성인이면서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했다.
상사가 직원의 뺨을 때렸다. 직원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은 듯 일을 했다.
상사가 직원에게 술잔을 던졌다. 신고를 하려는 식당 주인을 말리고 조용히 응급처치를 했다.
이들은 왜 당당하게 말을 못 하고 참았을까? 남자들이 자신에게 행해진 폭력을 권력관계 아래에서 참는 것과 여자들이 본인에게 폭력 대신 행사되는 희롱과 추행을 참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당당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싸울 수 있는 직원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고 해서 그 직원을 비난할 수 있을까.
어느 시장을 향한 미투에 대해 다 큰 딸이 둘 있는 아주머니 주무관은 "미투 하는 애들도 문제야. 그때는 괜찮다고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 와서 들춰내? 자기들이 싫었으면 그때 바로 얘기를 했어야지." 라며 젊은 여자들이 문제라고 했다.
회식자리에서 상사가 한 여직원의 이마에 뽀뽀를 했다. 그 여직원은 바로 얘기를 했고 신고를 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직원들은 다 모르쇠로 일관했고, 책임자는 이 일을 덮고 여직원을 다른 과로 보냈다.
이 일은 곧 전 직원이 알게 되었고, 직원들은 그저 그게 누구냐며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로 여직원의 신상을 파헤치기 바빴다. 결국 그 일이 우리 과에 전달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여직원의 신상도 밝혀졌다. 책임자가 덮으려던 일이 덮이지 않아서 그 여직원이 억울함이 풀렸을까. 사실 그 반대였다. 그 후 "남자가 똑똑한 사람이래. 서울대 나오고 일도 잘하는 사람인데. 여자가 평소에 좀 웃음 잘 치고 그랬대."라는 이야기가 나이 많은 아주머니 주무관들의 주도 하에 퍼지기 시작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가 피해자의 적이 되는 상황을 다 지켜보고 나서도 자신에게 행해지는 억압을 바로바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가 그 후배를 위해 해 줄 수 있었던 일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견디라는 무책임한 말을 내뱉지 않고, 비밀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해줄 수 있는 것이 고작 그뿐이었다. 그 후배의 퇴사가 현실로 다가 온 그 날, 나는 가슴에 큰 바위가 박힌 듯한 기분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언니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를 지켜주지 않는 회사는 그 이름이 얼마나 좋든 간에 버려. 그래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