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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womanB Oct 24. 2020

내가 여기서 더 오래 일했잖아

그와 잘 지내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내가 말이야, 000보다 여기서 더 오래 일했잖아. 직장생활도 더 오래 해봤고."


 아, 또 시작이다 저 멘트. 이번엔 내가 아닌 또 다른 직원이 저 말에 상처를 받는 중이었다. 계장은 우리에게 오래 일하며 터득한 노하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예전부터 그렇게 일했는데 그 방식이 문제가 없었으니 그 방식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친구는 이 말을 듣고 '그럴 거면 핸드폰도 2G로 바꾸시라 그래.'라고 이야기했었다. 


 계장의 일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계장은 그렇게 일을 해 왔고, 그 방식으로 승진을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세상은 변했고 사람들도, 인식도 변했다. 실의 명칭이 바뀌면 바뀐 날 바로 명패가 바뀔 수는 없는 것임을 사람들은 알고, 모르면 알게 만들어야 한다는 게 지금의 생각이었다. 어떤 실이든 공사 요청을 하면 진행부서에는 정해진 결재 절차가 있고 계약부서는 업체와 계약을 해야 하고 업체는 사람을 구해야 하기에 적어도 1주일 정도는 걸린다는 것 또한 사람들이 알도록 하고 '당장 내일 해주세요.' 같은 발언에도 그게 정상적인 절차가 아님을 알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계장은 지금의 생각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본인이 지내온 방식이 옳은 만큼 지금 주무관들의 방식도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각기 다른 10여 명 모두의 업무방식을 본인의 방식으로 바꾸려 했다. 계장은 윗사람에 약하고 아랫사람에 강한 사람이었다. 힘이 약한 부서에서 오는 요청은 계약 후 해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다가도 윗사람의 요청에는 바로 해달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당장 내일' 가능한 업체를 찾으라 했다. 높은 분이 떼를 쓰면 어쩔 수 없는 것이 공무원이지만 해달라고 하지 않은 것까지 무리해가며 선공사를 해야 하는 것에는 의문이라고 하자 계장은 그 윗사람이 말로는 표현을 안 해도 그걸 바랄 것이므로 알아서 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를 배제한 채 일정 협의를 했다. 그렇게 계장의 방식대로 하는 일정 협의에 주말 일정을 취소해야 하는 것은 결국 나였다.



 어느 금요일, 한 부서의 시설물 설치 요구에 나는 다음 주 월요일 중으로 조치를 해주겠다고 했고 그 부서에서도 그 정도면 감사하다고 했다. 그때 계장은 출장 중이어서 나는 그 일을 과장과 결정했다. 그러나 계장은 주말에 연락을 해서 그 부서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 월요일 오전 8시 전까지 설치를 완료해라고 지시했다. 나는 최대한 오전 중으로 조치하겠다고 대답했다. 

 "최대한 오전 중?"

 자신이 8시 이전이라고 했는데 곧바로 알겠다고 하지 않고 왜 다른 말을 하냐는 말투였다. 나는 그 부서와도 협의가 되었고 과장님께도 보고가 완료된 건이어서 굳이 그렇게 무리할 필요 없을 것 같다고 했고 그는 대답이 없었다. 일단 알겠다고 한 뒤 업체에 전화를 걸어 사정이 이러하니 조금 일찍 와달라고 했고 계장의 성격을 아는 업체도 알겠다고 했다. 

 월요일, 업체는 8시 40분 정도에 도착해 설치를 시작했고 사장은 나에게 '주말 내내 계장님한테 전화 왔어요. 출근 전 완료했다고 보고 하고 싶으셨던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급한 일이면 밤도 새우는 것으로 유명한 이 업체가 계장의 전화에도 늦게 도착한 것은 그리 급한 것이 아님을 간파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계장 전화에도 8시 전이 안 되는 걸 내가 무슨 수로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사무실로 돌아왔고, 계장은 나에게 나와보라고 했다. 

 

 아무도 없는 적당한 곳을 찾더니 계장은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서 몇십 년은 더 일했을 거야. 그래서 여기 상황을 더 잘 알고. 그러니까 저번 주말에 그렇게 미리 해두라고 지시를 해던 거고. 내 말이 이해가 가나?"

 '그건 저번 주말에 내가 알겠다고 하면서 이미 끝난 얘기 아닌가. 내가 끝까지 안 한 것도 아니고, 업체한테 계장 말대로 업무지시도 다시 하고 그렇게 진행하기로 했다고 보고도 한 건을 왜 지금 불러서 또 얘기를 하는 걸까 싶었다. 본인이 나를 믿지 못하고 주말 내내 따로 연락을 했음에도 업체가 늦게 온 건 내 탓이 아닌걸 왜 이렇게 따로 불러서까지 애기하는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 말할 기회가 있을 때 말해야겠다 싶어 나는 그동안 느꼈던 업무방식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해서 이야기했다.

  "말씀 이해를 못한 건 아니에요. 근데 저는 우리가 업무절차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 있고 논리가 있으면 그 실과 그렇게 협의해서 일을 진행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뭐 하청도 아니고 똑같이 시험 봐서 들어온 공무원인데 왜 그렇게 저자세로 일을 해야 하는지 전 모르겠어요."

 "나도 주무관 때는 그런 생각 했어. 근데 내가 더 오래 일 해 봤잖아. 일해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 그런 식으로 일하면 문제가 꼭 생겨. 나는 나한테 이런 말 해주는 선배도 없었어. 나한테 이런 조언 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조언해주는 거야."

 나는 '계장님이 다른 과에서 주무관 하시는 동안 여기서 최근을 더 오래 경험한 건 저인데요. 제 방식대로 일해도 아무 문제 생기지 않던데요.'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겨우 누른 채 부들거리는 손을 부여잡고 그저 묵묵히 서있었다. 그는 그 뒤로도 계속 '내가 더 오래 일했다.'를 강조하며 나의 방식이 틀렸음을 이야기했다. 그가 '내가 더 오래 일했잖아.'를 한번 내뱉을 때마다 내 가슴은 쿵, 쿵 내려앉았다. '아, 이 사람은 바뀌지 않겠구나.'

 


 그 이후 나는 계장의 부름에 영혼이 없어진 목소리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면 하라는 대로. '에너지 효율에 취약한 부분을 찾아 단열필름 설치를 검토하겠음.'이라고 한 줄로 답변을 하면 되는 건에도 전체 소속기관 건물이 무슨 유리로 되어있는지를 다 찾으라는 쓸데없는 요구를 해도 영혼 없이 찾아다 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렇게까지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했겠지만 말을 섞다가 오는 스트레스를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자료 찾느라 힘든 게 나았다. 그러고 나니 나름의 기대와 애정을 가지고 계장을 대할 때는 몰랐던 사무실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주무관들도 그와 길게 말하려 하지 않고 있었다. '말 오래 해봤자 소용없다. 그냥 맞춰주자.'는 식으로 영혼 없는 '네.'만 울리고 있는 사무실 분위기에 내가 뒤늦게 동참을 하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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