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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womanB Oct 20. 2019

약속시간이 무의미했던 하루

이사가 원래 이렇게 예측 불가한 것이었나 

 이사 당일 오전 8시, 전화가 울렸다. 

 "네, 여보세요"

 "위니아 대우 냉장고 배송기사인데요, 오늘 오전 10시에 배송드려도 되나요?"

 "저 오후 5시 이후로 말씀드렸는데요."

 "안돼요. 거기 00단지에 오전 배송 갈 게 있어서요. 오후에 배송드리려면 제가 그 00단지를 끝나고 다시 들러야 하는 상황 이어서요."

 이마트에서 대우 Klasse 일반형 냉장고를 살 때 배송시간을 오후 5시로 요청했었다. 직원은 요청사항으로 적긴 하겠지만 아마 배송기사님 마음일 거라고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다. 심지어 나는 오후에 오기로 한 이사 용달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 다시 한번 가능하면 오후였음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아, 제가 지금 거기 있는 게 아니고 오후에 올 이사집 차를 기다려야 해서 오전에 가기 어려운데요."

 "고객님 안 계시면 제가 들어가서 설치해도 되는데요, 비밀번호 아니에요?"

 "오늘 입주라 비밀번호는 아니고, 그럼 열쇠 관리실에서 받아서 들어가 주시겠어요? 신분증 교환하셔야 해요."

 "아 그렇게는 못 해 드려요."

 오전에 무조건 해야 한다고 빈 집이라도 들어가서 하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관리실에서 신분증 교환을 해서 들어가 달라고 하는 건 안된다는 건 또 무슨 변덕일까. 


 "그럼 전 오후에나 가능한데요."

 "이거 00단지 오전 배송이 미리 약속된 거라서, 못 바꾸는데요. 어떻게 오전에 못 오실까요?"

 여기서 나는 더 어이가 없었다. 다른 집에서 한 오전 배송 요청은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고 내가 한 오후 배송 요청은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그래, 내가 더 만만해 보이는 목소리였나 보다. 내 목소리가 어린 여자가 아니었다면, 조금 더 강한 어투로 말했다면 아마 나보다 먼저 전화를 걸어 오전 배송을 '약속'한 그분에게 사정상 오후에 배송해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하냐고 다시 물었겠지. '어휴, 용달만 생각하고 오후 반가를 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네. 그래, 뭐 왔다 갔다 하면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하는 생각으로 욱 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설치하는 데는 얼마나 걸리는데요?"

 "얼마 안 걸려요, 바로 돼요."

 "그럼 일단 알겠어요. 10시까지 가 있을게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급히 나갈 준비를 했다. 원룸에서 아파트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가는 도중 전화가 두 번 더 울렸다. 

 "안녕하세요, 세탁기(LG 통돌이, 인터넷 구매) 설치기사인데요. 오늘 배송 몇 시 원하시나요?"

 "안녕하세요, 전기레인지(쿠첸 하이라이트 3구, 하이마트 구매) 설치기사인데요. 오후 5시 이후 배송 요청하셨는데 그대로 배송드리면 되나요?"


 냉장고 설치기사님처럼 막무가내는 아니라는 것이 감사했지만 이미 냉장고 배송시간이 오전이 되어 아파트로 가고 있는 상황이라 차라리 다들 오전에 오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혹시 오전 배송 가능하신가요?"


 세탁기, 전기레인지 모두 10시 30분~11시 사이에 방문하는 것으로 하고  오전 10시, 아파트에 도착했다. 오전 10시에 꼭 설치를 해야 한다는 냉장고 설치기사님은 10시 30분에 도착했고, 냉장고 설치가 끝난 뒤 세탁기, 전기레인지 순으로 설치기사님들이 왔다 가셨다. 전화를 받을 때는 세 가전제품 설치기사님들이 같은 시간에 각자의 가전제품을 설치하는 북적이는 그림을 그렸지만 신기하게도 그 짧은 시간 동안 기사님들끼리 겹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원룸으로 돌아가 3시에 오기로 한 용달을 기다렸다. 2시 30분, 전화가 울렸다. 

 "오늘 오후 3시 00에서 00들러서 00가는 용달 신청하셨죠?"

 "네 맞아요."

 "지금 오전 용달이 좀 늦어져서, 1시간 정도 늦게 도착할 것 같아요."

 "퇴근시간 안 겹치게 더 당겨서 와달라고 했는데 늦으신다고요?"

 "네 그렇게 됐네요."

 그 전주에도, 그 전전주에도 가능하면 퇴근시간에 겹치지 않게 더 일찍 와달라고 했었고 알겠다고 했던 터라 한숨이 나왔다. 게다가 5시에 장롱이 들어오기로 한 상황이라 조금 곤란한 상황이었다. 함께 원룸에서 용달을 기다리고 있던 아빠와 대책을 세웠고 결국 아빠는 먼저 아파트로 가서 장롱을 받기로 했다. 

 

 나는 아빠에게 옷장과 이불장, 화장대 겸용 수납장의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장롱은 예정된 시간에 도착했다. 아빠에게 전화가 왔고 아빠는 나에게 장롱을 설치하는 사람들이 내가 원한 배치의 반대가 더 유용할 것이라고 했다며 배치를 바꿀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나는 방문 쪽에 이불장을 두려고 했는데 이불장은 잘 사용하지 않으니 더 자주 사용하는 옷장을 방문 쪽에 두는 것이 일반적으로 맞다는 의견이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만 나는 이불장 위칸에 있는 헹어와 아래에 달린 서랍을 다 자주 사용할 것이었기 때문에 그 의견은 내 생활과는 맞지 않으니 내가 원하는 대로 배치해달라고 했고 아빠도 그렇게 전달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설치되도록 봐주겠다고 하셨다. 


 용달은 4시 30분에 원룸에 도착했다. 용달에 원룸의 짐을 실어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 집으로 보냈다. 부모님 집에서 내 책상과 책장을 싣고 아파트로 오는 것이 정해진 일정이었다. 용달이 부모님 집에 도착한 것이 6시 이후였고 우려했던 대로 퇴근시간과 맞물려 길은 밀렸고 오후 8시가 되어서야 아파트에서 이삿짐을 받아볼 수 있었다. 


 부모님과 대충 짐을 정리하고 저녁을 먹으니 오후 10시였다. 책과 그릇들만 정리된 상태였고 옷과 나머지 물건들은 그대로였다. 부모님은 나에게 오늘 하루에 다 할 생각은 하지 말고 천천히 하라고 하시며 집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그래도 옷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장롱을 채웠고 12시 30분, 옷방에 청소기를 돌린 후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 장롱(옷장-화장대 겸용 수납장-이불장) 배치: 옷방 문쪽에서 먼 순서로 옷장-화장대 겸용 수납장-이불장을 배치했다. 옷장에는 긴 옷들이 들어갈 수 있는 헹어가 있어 긴 외투와 원피스를 넣었고 이불장 아래칸에는 이불, 위칸에는 재킷이나 트렌치코트 등의 외투, 아래 붙어있는 서랍에는 상의와 하의를 넣었기에 실제로 이불장 아래 서랍을 가장 많이 열고 닫고 이불장 위칸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원피스를 잘 입지 않기 때문에 옷장은 거의 열 일이 없다. 설치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으로'를 따르지 않고 내 수납 계획을 따라 배치한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옷을 꺼낼 때마다 한다. 


 이사 다음날은 공식적인 원룸 퇴거일로 원룸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받아야 하는 날이었다. 부동산에서는 새로 들어오는 분이 오전에 보증금을 집주인에게 보낸다고 했으니 나도 오전 중으로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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