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수필
꽤 유명한 말이다. 존재는 부재로써 증명된다. 왜,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는 문장도 있는 것처럼. 어떤 존재의 부재로 생겨날 공허는 그것의 존재감만큼 자리 잡는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이해했던 만큼 부재를 체감한다. 그 말인즉슨, 존재는 곧 부재에 비례한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라는 말도 있다. 익숙함은 체감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아 서서히 스며들 뿐. 우리의 삶을, 우리의 기분을 서서히 잡아먹으며 우리의 일상을 잠식한다. 그러다 보면? 소중함은 마냥 사라지게 되지. 익숙함은 곧 소중함의 천적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소중함과 함께 공명한다. 익숙함과 소중함은 궤를 함께 한다. 둘은 곧 존재에 관한 개념이기에.
익숙한 존재가 부재를 만난다면, 소중함을 체감하게 될 테다. 부재가 곧 존재를 증명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후회해도 소용없을 때가 대다수. 그러니 우리는 부재를 두려워해야 한다. 부재는 그것이 잉태한 상실감을 보호자처럼 키워낸다. 때문에, 상실감은 상실되지 않는다.
알고 싶지 않았다. 짧은 삶을 지내며 많은 상실을, 부재를 알게 되었다. 다양한 색의 상실과 부재. 졸업, 실연, 죽음. 많은 상실과 그로 인한 부재가 나를 죽이려 했다. 상실의 순간부터 증명된 존재가 있는가 하면, 당시에는 미처 체감하지 못하다, 나중에서야 증명된 존재가 있다. 폭발하던 상실감. 그리고 서서히 퍼지다 펑, 하고 터져버린 상실감. 어느 하나 쉬이 보낼 수 있는 상실은 없다. 다만 희미하게 번질 때까지 일상을 살아가며 기다릴 뿐이다.
이별이 두려워 더는 만남을 가지지 않으려 했던 때가 내게도 있다. 새로운 만남은 곧 새로운 이별. 나는 이별을 두려워했고,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소원해지는 관계와 절연, 졸업과 이사 등의 이유로 생겨난 이별은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새로운 만남이라는 변수 대신 일고 지내던 관계라는 상수를 택했다.
그러나 삶은 늘 변수를 만들어 낸다고, 나이를 먹어가며 많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 늘어났고, 자연스레 새로운 만남이 늘어갔다. 그 과정에서 친구를 사귀기도 했고, 애인을 사귀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만남이 재밌어졌다. 여전히 이별은 두려웠지만, 새로운 만남이 두려워지지 않게 되었다.
아직도 이별은 두렵다. 그러나 하나 깨달은 사실은 있다. 마냥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환경이나 사정은 어떻게 조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니, 적어도 관계의 온도만큼은 늘 따스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종의 책임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 사람이 소중한 만큼 따스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력 없이 유지되는 관계는 없고, 그것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사실. 어쩌면, 그런 노력이 영원한 관계를 보장하지 못할지라도, 오래도록 관계를 유지케 하지 않을까.
내가 품은 존재가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이겠지. 그러니 나는 다만 노력하려 한다. 부재를 느끼지 않으려 애쓰려 한다. 관계의 온도를 언제나 따스하게 유지하기,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않기. 당신과 나의 관계를 무너뜨릴 변수에 맞서야 한다. 우리의 관계가 변수에서 상수가 되게 끔. 당신에게 문자 한 통을 더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