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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들리Ridley Aug 19. 2024

창작 없는 세상에서 창작한다는 건

리들리 수필

  몇 년 전에도 한 영화 평론에서 읽어본 듯한 말이다. 하늘 아래 더는 새로운 것은 없고, 오늘날의 창작은 기존의 것들을 어떻게 조합하고 비트느냐의 문제라고. 사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다못해 여태껏 내가 써온 글과 문장들 또한 내가 인지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곳에서 영향을 받은 존재들이니. 나와 당신이 사랑하는 많은 영화나 소설 또한 이미 오랜 시간 전에 탄생한 문학과 신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의 창작은 사실상 오마주나 패러디의 영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어떤 예술가를 꿈꾸던 어릴 적에는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었다. 나만큼은 최초의 무언가를 창작할 수 있을 거란 야망 혹은 무지한 오만이 가득하던 시기.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사실 앞에서 무기력해지지 않은 채로 정면 돌파하고 싶었다. 그러나 많이 읽고 많이 쓰는 만큼 야망은 점차 수그러들고, 오만은 겸손과 위축으로 변해갔다. 나 또한 다른 예술가와 별반 다르지 않고, 그렇게 이미 태어나버린 존재들을 변형하고 응용해야만 되려 나만의 창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예술에 창의성보다는 융통성이 더욱 강력하게 기능한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 창작이라는 행위를 바라보는 시선이 서서히 무기력해지고 염세적으로 변해갔다.



  그렇다고 창작하는 일에 어떤 염증을 느끼거나 다른 일을 더 좋아하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썼고, 무언가를 상상했다. 그것만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자, 내가 가장 좋아할 수 있는 일이었으며,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다른 일은 꿈꾸지 않았고, 꿈꿀 능력도 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저주였다. 그리 싫지는 않은 저주. 여전히 나는 호흡하듯 무언가를 창작했다. 더는 새로울 것 없는 세상에서 꾸준히.



  어찌 됐건 나는 기성의 존재들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 순응하게 되었다. 나는 창작을 시도하는 만큼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를 읽고, 듣고, 보고, 더 나아가 체험한다. 되도록 기억하기에 좋은 것만 취사선택. 다만 장르는 가리지도, 따지지도 않고서. 김종관 감독의 영화를 자주 틀어두고, 뉴진스와 유재하의 앨범을 번갈아 듣는다. 책상 앞에서는 나희덕과 김금희의 문장을 틈틈이 탐독한다.



  더는 새로울 게 없는 세상에서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기다린다. 그것이 내 손에서 태어날지, 다른 누군가의 손에서 태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구의 손에서 태어나든지, 나는 기뻐할 테다. 내 손에서 태어난다면 필자로서 기뻐할 테고, 다른 이의 손에서 태어난다면 독자의 관점에서 기뻐할 테지. 다만 그런 이유로 기뻐하게 될 확률이 0에 수렴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에 다소 슬플 뿐이다. 어찌 됐건 나는 그리도 의미 없을 기대와 그만큼의 좌절을 품은 채로 오늘도 노트북 앞에 앉는다. 그것이 나의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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