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수필
매일 면도하는 편이었다. 세수도 하기 전에 날 면도기를 들어 수염을 민다. 이전에는 값이 꽤 나가는 전기면도기를 썼지만, 사용자의 미숙한 면도 실력 때문인지, 혹은 날 면도가 훨씬 꼼꼼하다는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날 면도기를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충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편하다. 무선 이어폰 대신 유선 이어폰을 선호하는 이유가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날 면도기를 쥐고서 결 따라 힘을 뺀 채 그것을 움직인다. 구레나룻 아래까지 천천히 조심스레. 빡빡 세게 밀다 피를 본 경험이 몇 번 있었기에 십 년이 넘도록 면도해 왔어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첫 문장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근래 들어서는 매일 면도하지 않는다. 휴학을 이유로 웬만해서는 잘 나가지 않다는 게 주된 이유다. 솔직히 말하자면 집에서 글만 쓰고 공부나 하는 사람에게 면도는 일종의 '귀찮은 루틴'이다. 원체 자주 면도를 빼먹은 탓에, 씻기는 하지만 면도만큼은 잊어먹은 적도 더러 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지저분한 인간이 되어버린 건지.
지독히도 습도 높은 날이 줄지어 있다. 오늘의 습도는 89%. 외출하자마자 깊은 저 바닷속 파인애플이 실존하는 비키니 시티의 명예시민이 될 것만 같은 날이다. 어쩔 도리 없다. 산책조차 하지 않는 게 상책인 날이다. 현관을 나선 나의 상태를 높은 싱크로율로 상상할 수 있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나가자마자 빨리 집에 가고 싶다며 읊조리겠지. 여름은 내게서 많은 것을 압수했다. 즐겨하던 집 앞 산책, 점심 약속, 하다못해 좋아하는 도시로 무작정 떠날 엄두까지도.
그렇게 나는 면도마저 빼앗겨버렸다. 정확히는 면도할 의지를. 덥고 습해 면도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 분량의 글을 다 쓰고 어쩌다 손이라도 씻으려는 차에 거울을 바라보면, 나보다 대여섯 살은 더 들어 보이는 아저씨가 한 명 서 있다. 깜짝 놀라 '누구세요?'라고 물으면, 그는 나와 똑같이 입을 뻐끔거릴 뿐이다. 나태해진 인간 군상의 모습을 가장 확실히 목격할 수 있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역시 면도는 귀찮고, 습기는 지겹다.
면도하지 않는, 아니 면도조차 하지 않는 나는 바다를 유영하는 해 파리의 마음가짐으로 삶 속을 떠다니고 있다. 공수래공수거, 산은 산이고 물은 물, 유유자적. 삶을 향한 나태하고 가냘픈 태도. 그리 보기 좋은 태도가 아님을 안다. 나 또한 영 좋지 않게 바라보고 있고. 그렇지만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고 싶다. 누구나 그렇듯, 이상한 사람들 억지로 겪어가며 감정 소모하고 싶지 않다. 그저 맘 편히 살고 싶다. 습한 날에 구태여 맞서기 위해 면도하고 싶지는 않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겠지만 말이다. 하루 분량의 글이자 하루 분량의 무의미한 푸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