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수필
열일곱 살. 막 입학한 고등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한 채 학급에서 겉돌던 시기였다. 같이 등하교는커녕 밥 먹을 친구도 없었던 탓에 급식을 자주도 굶었다. 거의 매일 같이 혼자 교실에 남아있다가,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올 때쯤 1층에 있는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서관만 가면 마음이 편했다. 같은 반 아이들을 마주쳐 뻘쭘해질 필요가 없었고, 내게 눈치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맘 편히 글만 읽다 종이 치면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유일하게 맘 편하게 지낼 수 있던 공간이라는 점에서 도서관은 내게 소중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접한 잡지가 <씨네 21>이라는 영화 전문 주간지였다. 도서관을 찾은 학생의 대부분이 관심조차 주지 않았지만, 어쩐지 맘이 이끌렸다. 그 이유가 커버를 꿰찬 배우의 아우라 때문이었는지, 카피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매일 점심시간이면 도서관에서 <씨네 21>을 펼쳐 들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후로 <씨네 21>을 접하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줄은.
매일 <씨네 21>에 실린 영화 평론을 읽었다. 여러 배우와 감독, 스태프들의 인터뷰를 읽었다. 극장에 앉아있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다루는 글들은 모두 재밌었다. 그러나 영화에 관한 배경 지식이 전무했기에, 자연스럽게 영화를 챙겨보게 되었다. 덩달아 나도 그곳에 실린 평론들처럼 길고 해박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때부터 영화평론가가 되고 싶었다. 각종 영화계 인사들이 꾸준하게 영화계로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사춘기 특유의 치기 어린 신념 때문이었는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재미없고 지나치게 현학적인 예술 영화를 의무적으로 집중해서 감상해야 한다는 걱정 하나가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영화평론가를 꿈꿨다.
매일 서너 편의 영화를 새벽까지 챙겨보고, 혼자서 햄버거 하나 못 시키던 사람이 어찌어찌 '혼영'을 하게 되고. 밤마다 사적인 평론과 수필을 쓰고. 3년에 가까운 시간을 그렇게 살았다. 그 덕분인지 당시에 개봉한 영화나 영화계 정보에는 꽤 해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떤 예대의 영화 관련 학과나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냐고? 애석하게도 - 물론 지금은 그리 애석하지 않지만 - 나는 그저 어느 대학교에나 있는 보통의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영화를 좋아하고, 글 쓰는 일이 좋았지만, 굳이 입시를 위해 학원까지 다니고 싶지 않았다. 어찌 보면 열정이나 욕심 이 부족했을 수도, 달리 보면 입시마저 영화를 위해 치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때마침 영화를 향한 관심도 그 전만 못 했고, 그런데도 글을 쓰는 일은 좋아했기에 결국 국어국문학과에 지원했다.
다만 <씨네 21>이 바꿔놓은 내 삶의 방향은 달라지지 않았다. <씨네 21>을 읽게 된 이후로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독자에서 필자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마 그날 <씨네 21>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국어국문학과에 지원하지도, 이 지면에서 이 글을 쓰고 있지도 않았겠지.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며 매일 흰 화면을 검게 채운다.
내가 그날 <씨네 21>을 읽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영화과나 문창과에 진학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매일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에 와서는 의미 없는 공상이지만, 설령 그 공상처럼 살게 되었다고 한들, 어떻게든 지내고 있지 않았을까. 가고 싶었던 영화과에 진학하지 못했어도, 지금 내게 영화는 그저 킬링 타임이나 어떤 교양의 한 부분에 불과하더라도, 매일 글을 쓰며 나름 잘살고 있다.
영화에 목을 맨 채로 당시의 3년을 보내며 체감한 사실 하나는, 어떻게 되든 나름대로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삶이 그려온 삶과 형태가 다를지라도, 우리는 잘 적응해 가며 잘 지내겠지.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바뀌어 가는 삶의 모습에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게 이 글의 요지다. 더는 <씨네 21>을 자주 읽지 않아도, 더는 극장에 자주 가지 않아도, 영화에서 벗어난 학과에 진학했어도 괜찮았다. 나는 나름 잘 지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