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수필
영원한 존재는 없다는 말만이 영원할 뿐이라고 믿는다. 영원을 믿느냐는 어느 독자의 물음에 나는, '영원한 존재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영원한 존재가 있다고 믿고 싶죠'라고 답했다. '영원하다'는 말은 쉬이 꺼내기 어려운 말이다. 영원한 사랑이나 영원한 당신, 뭐 그런 존재가 있다고 믿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죽음으로 매일 달려간다. 죽음은 끝, 끝은 영원의 천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이 영원했으면 한다. 당신의 존재가, 당신의 입술이, 당신의 말들이 내게 영원했으면 한다. 그 앞에는 '감히'라는 단어가 늘 따라붙지만 말이지. 안다. 우리는 죽을 걸 알면서도 살아간다는 사실을. 다만 그 일이 극히도 먼일처럼 느껴질 뿐이라 체감하지 못할 뿐이지. 그런 식의 논리를 시선에 채워 봤을 때, 결국 영원한 존재는 없다.
그렇기에 '영원'이라는 단어 대신 '오래도록'이라는 단어를 앞에 붙인다. '오래도록'이라는 단어를 앞에 붙이면, 영원하다는 말의 책임을 덜 수 있고, 영원에 가까운 시간은 품을 수 있었으니까.
나는 영원한 존재를 믿고 싶었지만, 그것을 버린 채, '오래도록'이라는 유한한 시간을 택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당신이 내게 영원한 존재는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의 영원한 존재를 믿고 싶다는 말을 믿지 않을 테고, 나는 당신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영원' 대신에 '오래도록'이라는 유한 하지만, 영원하도록 느껴질 시간을 택했다. 믿음을 버리고 당신을 설득하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당신의 마음을 얻고 싶었거든.
따지고 보면 '영원' 대신 '오래도록'이라는 단어를 붙일 만한 존재도 그리 많지 않았다. 친구도, 애정도, 관심도, 내가 키우던 어떤 동물의 삶도 오래가지 못했다. 끽해서 수년. 수년은 내게 그리 오랜 시간이 되지 못했다. 어느덧 이별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고, 이런 마음가짐이 어른의 마음일까 생각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지. 낭만이 사라진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그럴까. 언젠가부터 다시 나는 되려, 감히, 무모하게도 영원을 꿈꾼다. 그것이 있길 바라며, 그만큼의 시간을 그리려 애쓴다. 당신이 내게 주는 사랑, 내가 당신에게 주는 사랑, 뭐 그런 존재가 영원하길 바란다. 그러나 그런 생각마저도 언젠가 나를 떠나가겠지. 나의 바람도, 당신의 존재도, 우리의 사랑도 모두 떠나갈 테다. 그렇다면 나의 영원은 결국 '오래도록'이라는 유한한 시간에 갇힌 역설에 불과할 테다.
나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나 어렵고도 이상하게 영원을 꿈꾼다고 말해도, 결국 생각의 종착지는 '영원한 존재는 없다는 말만이 영원할 뿐'이라는 결론이다. 나의 영원, 당신의 영원, 아무개의 영원 모두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떠나갈 테고. 두렵다. 그러나 살아간다. 우리가 죽음을 향해 다가가지만, 그것을 체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당신과의 '영원'이 떠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내게 너무 잔인하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는 감히 영원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