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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촌 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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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VN Solo Dec 25. 2019

초침 없는 시계

이촌, 향도 (7)

 연말이다. (신선한 표현을 생각해봤지만 연말이란 모두에게 식상하며 동시에 언제나 새롭기에 그냥 쓰기로 한다.) 작년 이맘 때는 전 여자 친구와 연애에 여념이 없었고 특히나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라 준비하느라 경제적으로도 궁핍했다. (지금도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으니 돈을 모으지 못하는 데 있어서 연애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게 밝혀졌다.) 올 연말에는 별다른 스케줄이 없다. 조촐한 사촌 모임이 전부고,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디스코드로 모여 게임이나 하고 있을 예정이다. (여기서 여느 때란, 매년 연말과 비슷하다는 의미, 올 한 해 내 내 와 다름없다는 걸 의미 모두를 말한다.) 물론 내년이면 이 모든 게 달라질 테지만 연말이니까 한 해를 돌아보고자 한다.* (전반기에는 연애사업만 했으니 생략한다.)



 하반기에는 책 모임을 많이 가졌다. 시작은 트레바리였고 서평 쓰기도 시작했고 문학에 대한 관심은 급기야 소설 쓰기까지 이어졌다. 술 마시고 신청했던 모임 덕분에 어찌어찌하다가 휴대용 가습기만큼만 촉촉한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면 허기가 사라진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않고 글을 쓰는 자체 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 그렇다고 인정 욕구가 없진 않다. 당연히 나 혼자 읽으려고 쓰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누군가에게 닿아 공감이나 변화를 만들어내는 글이 되었으면 하다. 그런 면에서 브런치에 글쓰기는 절반의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엔 정리해서 글을 올렸으나 언젠가부터 그냥 올리기에 급급해졌거든.
 처음 트레바리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가성비가 좋은 모임은 아니다. 한 달에 네 번 모이는데 20만 원. 1회에 5만 원 꼴이다. 한 번에 세 시간 반 정도 하지만 책 선정이 마음에 안 들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빠져야 한다면 상당한 타격이다. 그 때문일까, 모임엔 성의가 넘쳤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열린 사고를 가지려고 노력하시는 여의도의 부장님이나 직업의식이 뚜렷한 포털의 디자이너, 항상 은퇴 이후의 아름다운 노년을 꿈꾸던 치과 의사, 책이 좋아 진지하게 소설가를 꿈꾸는 분들까지. 여기 참여하지 않았다면 만날 일 없던 분들이었다. '원래 나라면 절대 안 읽었을 책'을 읽고 관련 소재로 천 자가 넘는 에세이를 쓰는 것도 서로의 글을  진지하게 평하는 것도 좋았다. 트레바리 덕분에 대학원에서 쌓은 답답함을 많이 해소했다.
 서평과 소설 창작 수업은 트레바리 때문에 시작했다. 더 잘 읽고 쓰고 싶었다. 내가 정말 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많이 읽고 쓰고 있긴 하다. 그거면 된 거 같다. 강사님과 함께하는 멤버 모두 좋은데 시간대가 평일 오전이다 보니 대부분 중년의 여성 분들이라는 게  아쉽다면 아쉽다. 하지만 거기에도 다양성이 없는 건 아니었으며 수업의 질과 열정은 대학원과 다르지 않았다. 모두 진지하게 과제를 해왔고 진심으로 2시간 수업에 참여했다.



 책과 한결 친해진 한 해 동안 얻은 내가 얻은 선물은 '말'이다. 생각만 많았는데 전보다 편히 말할 수 있다. 초등학교 시절 이후 처음이다. 굳이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고 참여하고 싶어도 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였는데 아무래도 삶과 소설에 관한 생각을 나누는 일은 내 논리 구조만 명확하면 된다는 생각이 드니까 좀 더 마음이 놓이고 말하고 싶어 졌다.
 더 일반론적으로 말하자면 여유로움이다. 지난 블랙프라이데이 때 초침 없는 시계를 샀었다. 편안했다. 초침이 보이질 않으니 시간이 멈춘 듯했다.  연 초에 타이맥스를 샀었는데 초침 소리가 너무 커서 초조하고 조급해지기 일쑤였다. 이번에 산 시계는 그렇지 않았다. 엊그제는 대학원 입학 때 선물 받은 좋은 시계도 찾았다. 태그호이어는 초침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서 좋다. 내년에도 지금 같이 초침이 없거나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졌으면.

*의도적으로 서두에 괄호를 통해 연말의 교차하는 만감을 담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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