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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촌 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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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VN Solo Feb 16. 2020

지하상가 그 덮밥집

이촌, 향도 (8)


 몇 번의 이별 끝에 동네엔 전 여자 친구들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았다. 공교롭게 그들은 멀리로 이사했고, 나만 여전히 이 도시의 중심지에 산다. 이따금 에펠탑의 낙서, 남산타워의 자물쇠처럼 과거의 마음과 만나는 경우가 있다.



한남동에서 돌아오는 길, 사촌 동생과 SNS를 이야기하다 문득 E의 소식이 궁금했다. 내가 그간 좋아한 정도로 따지자면, 그렇게 높은데 위치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헤어지고 난 후 약과 술에 취해 (전에는 해본 적 없던) 연락을 여러 번 했고, E는 몇번 전화를 받다가 나를 차단했다. 전화도, 카카오톡에서도. 사촌 동생의 폰으로 로그인해, 전화번호를 검색해 E의 업데이트된 사진들을 보았다. 그녀와 만날 땐 전화번호를 외우질 못했다. 이미 최근 목록에 항상 올라와 있었고, 카카오톡을 전화를 했으니까. 헤어지고 난 후에야 전화번호가 선명히 기억에 남았다.
 E는 잘 살고 있었다. 헤어질 때 내가 준 가방을 메고 찍은 사진들을 본 적이 있는데, 이제 그 가방을 잘 메지 않는듯했다.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라지만 E는 전보다 더 예뻐진듯했다. 그리고 퇴사를 했던 건지, 새로운 남자 친구를 만난 건지 자주 사진을 업데이트하고 있었다. (누가 세 달 동안 프사를 일곱여덟 번 바꿀까?) 사진을 보고 나니 E에 대한 궁금증(과 인정하기 싫은 그리움)이 좀 풀렸고, '그래, 나도 나의 삶을 살아야지'하는 생각이 조금은 들었다.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해서 변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누구와든 헤어질 땐 싸움은 없었다. 그저 조용히 통보받았을 뿐이다. 나는 구차하게 붙잡지 않았고 그저 보내주는 사람이었다.
 여러 문제로 인해 불안장애와 다투고 있으며, 가족들에게는 대부분의 문제는 말했다. 하지만 연애 문제만은 잘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실연의 아픔도 다른 문제처럼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 했을 텐데 말이다. 계속 생각이 나는 건 가장 최근에 만난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차단까지 당했으니 더더욱 생각날 수밖에 없다. 한적한 한강공원, 지하상가 그 덮밥 집,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전지현의 건물이라는 스타벅스에 까지도 E의 망령은 여전히 날 감싸고 있다. 아, 우리 집의 내 방에도. 나는 그녀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그리워하게 되었을까. 마음은 알 수가 없다. 내 마음도, E의 마음도.


015B - 1월에서 6월까지 (feat. 윤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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