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다만 그리움

분분한 6월

by 서녘 나루

2023년, 꽃잎이 흐드러진 6월. 엄마는 폭양아래 푸르른 신록을 품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 곁으로 홀연히 떠나갔다. 홀로 40여 년, 그 장구한 세월을 오매불망 아버지를 그리더니, 42년이 지난 후에야 기어코 그 바람을 이뤘다.


6월의 하늘은 때아니게 카랑하고 푸르렀다. 꽃을 무척이나 좋아하더니, 장례식장도 산천도 꽃으로 만발했고, 고향 마을 어귀에 마중나온 알록달록 동네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엄마는 한폭의 꽃이 되어 아버지 옆에 나란히 누웠다. 슬펐던 것도 같고 아니었던 것도 같다. 자식을 일곱이나 데리고 그 멀고도 험한 비탈길을 홀로 걸어야 했던, 한없이 애잔한 생이었다.


혹한의 1월 어느날, 아버지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마흔 아홉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하루 아침에 닥친 돌연한 비극. 엄마는 평범한 가정에서, 딸 둘 중 맏이로 태어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시집와서도 총명하고 부지런하니 시부모님과 남편의 사랑도 두터웠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딸로 성장하며 받았던 아쉬움은 4남 3녀를 낳고 기르는 것으로 상쇄했고, 방앗간 집의 맏며느리, 일곱아이의 어머니로서 평범하지만 단단하고 아늑한,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안온한 삶이었다.


아버지의 장례 후, 다른 형제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중학생이던 나와 초등학교 3학년이던 동생만 시골집에 남겨졌다. 망연자실한 엄마와 틱장애로 머리를 까불어대는 열 살 동생과, 열네 살 한창 질풍노도를 걷고 있던 나. 그렇게 세 사람의 불안한 동거였다.


그때 엄마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부재를 부정하며, 오종종 남겨진 일곱 자식과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함을 맹렬하게 거부했다.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는 지독한 거식과 불면, 무기력. 때때로 분노에 찬 독설로 어이없는 운명에 악다구니를 써대며,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패대기쳤다.


자식들이 끼니는 때우는지, 학교를 가는지는 무참히 지워버리고, 날이 밝으면 꽁꽁 언 무덤으로 달려갔다. 간신히 입혀놓은 잔디를 쥐어 뜯으며 "아베 아베"를 목놓아 부르다 기진하면 무덤에 얼굴을 묻고 껴안듯 누워있던 엄마...


그 그로테스크한 장면에서는 슬픔이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상실의 고통이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모든 것을 내던져버린 듯한 처연한 엄마가 한없이 낯설었다. 그렇게 내가 마주한, 사랑하는 이를 영원히 잃어버린 사별의 모습은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어색하고도 생경한 풍경이었다.


그 겨울은 끝날 줄을 모르고 악착스럽게 추웠다. 동생은 한창 자라나는 어금니와 충치로 밤마다 통증을 호소했으나 엄마는 듣지 못했다. 긴 겨울밤 엄마는 상실의 아픔으로 통곡했고, 동생은 치통으로 울었고, 엄마는 막내 아들의 아픔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말을 잃었다.


집을 떠난 형제들은 남은 자의 슬픔은 가늠조차 못한 채, 각자의 자리에서 학업과 군대 생활을 마무리하느라 분투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은 서로를 돌아볼 겨를없이 저마다의 다른 공간에서 저마다의 다른 방식으로 흔들리고 있었고, 그러한 모습은 사춘기였던 나에게 깊은 균열을 남겼다.


그로부터 2년 후 쯤, 엄마는 종교에 귀의하고 나서야 다시 새 세상을 살아볼 의지를 조금씩 갖게 되었고, 세상밖으로 간신히 걸음을 내디뎠다. 이후 엄마 혼자 헤어나와야 했던 그 고단한 생은 이루 말할 수 없어 차마 간단히라도 적기가 어렵다.


나는 살아온 내내 이별에 서툴고, 만남에도 서툴렀다. 그러니 오는 사람에게 다정하지 못했고 가는 사람을 아쉬워하기보다는 가벼이 놓아버리고, 냉큼 빗장을 걸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마음을 쏟고 그러다 자칫 닥쳐올지도 모르는 이별이라는 공식은 생각만으로도 두려워 미리 견고한 장벽을 쌓았다. 혹여 강아지 한 마리일지라도 관심도 사랑도 주지 않는 것. 그게 내가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고 온전히 살아갈 길이라 여기며...


지난 주 엄마의 2주기 제사를 모셨다. 여름을 알리는 오락가락 비바람에 우산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가파른 언덕길을 올랐다. 산소에 다다르니, 어느새 햇살이 뜨겁다. 소풍용 매트를 깔고, 소박한 제사상을 차렸다. 엄마는 생전에 소식하던 분이니 번잡하게 차릴 필요는 없다고, 또 기독교인이니 자손들이 제사 지내는 걸 반대할 거라고, 초라한 상차림을 변명하며 그야말로 격식도 뭣도 없는 가난한 제사를 올렸다.


엄마가 좋아하던 체리, 망고, 참외, 완두콩밥, 그리고 박카스. 엄마는 박카스를 달고 살았다. 요양병원에 가기 전에는 하루에 얼추 열병을 마시기도 했다니, 엄마의 박카스 사랑은 엉뚱할만큼 유난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늘 뒷전이던 엄마가 하루하루 살아낼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박카스 덕분이었을까... 그 시절 어린 나로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엄마는 말없이 박카스랑 그 세월을 견디셨구나.


푸른 하늘아래 꽃잎이 흩날리고, 짙은 초록 바람이 숨결처럼 스며드는 계절. 꽃과 눈물, 햇살과 바람. 엄마가 떠나간 6월은 그렇게도 온통 분분했다. 나는 여전히 이별에 서툴고, 사랑을 전하는 데 어색하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놓치는 순간들을 애써 외면하지 않고, 조금 더 머무르고, 조금 더 함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엄마의 시간을 기억하며, 다만 그리움으로, 다시 분분한 6월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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