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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Sep 29. 2022

엄마는 죽었지만 잘 지낸단다

영화 <로스트 도터>, 원작소설 <잃어버린 사랑> (엘레나 페란테) 리뷰

 (스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는 거다. 관습에 얽매이지도 않고 모든 일이 뻔하게 느껴져서 감각이 무뎌지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가는 거다.  탯줄이 끊어진 이래로 누구에게도 속박당한 적이 없는 그런 상태로.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었다. 활자와 문단 사이로 영화의 장면들이 떠올라 책장이 쉽게 넘어갔다.      




해변에서 바다를 향하는 레다의 눈빛은 어딘가 종잡을 수 없는 데가 있다.

그녀의 눈길은 젊고 아름다운 여인 니나를 향해 있다. 니나의 팔에는 어린 딸아이가 안겨 있다. 레다의 눈이 두 사람의 행동을 좇는다. 그 눈은 집요하고 관음증적인 구석이 있다. 사실 그 눈이 향하는 대상은 레다 자신인지 모른다.


니나(다코타 존슨 분)와 그녀의 딸 엘레나


니나는 어딘가 불안하고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젊다는 것 자체가 불안을 내포하고, 불안은 무지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모르긴 해도 얼떨결에 엄마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엄마가 아이를 간절히 원해서 계획적으로 임신하고 출산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몸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취약하고 무방비해서 임신은 준비 없이도 얼마든지 사고처럼 찾아올 수 있다. 몸에 깃든 생명은 여성의 몸뿐 아니라 삶 자체를 급격하게 변화시킨다. 지나온 삶의 한때, 니나와 마찬가지로 혼란과 불안이 폭풍같이 휘몰아쳤던 레다는 그러나 믿기지 않게도 계획하에 두 딸을 출산했다.      

카메라는 근접 거리에서 젊은 여인과 어린 딸을 비춘다. 엘레나는 바닷물을 떠 와서 지친 듯 누워 있는 니나의 몸에 뿌리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 옆에 같은 자세로 누워 있는 인형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한다. 햇빛으로 달아오른 몸을 식히려는 아이의 손길은 진지하다. 아이는 작은 입으로 뭐라 뭐라 말하고 여인은 응대해 준다. 그 모습을 카메라뿐만 아니라 레다의 눈이 집요하게 좇는다.

     

레다는 홀로 이곳 그리스의 해변으로 여름휴가를 온 참이다. 차에 책들과 강의 자료를 잔뜩 싣고. 그는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그는 자신의 일을 좋아한다. 사실 그에게는 지금이 최고로 만족스러운 상태이다. 혼돈의 젊은 시기를 건너 직업적으로나 실존적으로나 완벽하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자신이 키우던 두 딸은 이혼한 남편이 사는 캐나다로 보냈다. 딸들을 먼 곳으로 보낸 상실감은 의외로 크지 않았다. 잡다한 집안일들을 졸업할 수 있었으며 일에 능률이 올랐다. 주변에서 얼굴이 좋아졌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참에 혼자만의 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해변이 있는 곳을 검색해 숙소를 잡고 떠나왔다.     


젊은 시절의 레다(제시 버클리 분)


레다가 아기 엄마 니나에게서 유독 눈을 떼지 못한 이유는 그에게서 자신의 젊은 시절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는 중간중간 레다의 과거 한 시절을 플래시백으로 삽입한다. 그 시절은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자신을 바라보는 두 아이 틈에서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표정이 없는 그녀는 뭔가 욕구불만에 차 있는 듯하다. 그녀의 두 딸도 불안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엄마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엄마의 시간을 독점하려는 두 아이와, 자신의 일이 우선인 남편의 비협조 속에 24시간 자신을 잃은 채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라고 묻는 듯한 젊은 레다의 흐릿한 얼굴. 거기에 딸들을 향한 사랑만으로 충만한 엄마는 없다. 그와 대비되어, 생각지 않았던 기회가 선물처럼 찾아온 뒤의 레다는 행복감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소분해서 냉장고에 넣어두는 일까지가 그녀의 남은 숙제다. 문을 나서는 그녀의 몸은 깃털처럼 가볍다.

집을 떠난 그녀에게 딸들과 남편은 그대로 삭제되어 버린다. 생각지 못한 기회인 그곳, 영국에서 레다는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한다. 학문 연구에 매진하면서, 저명한 학자에 섹시하고 매력적인 하디 교수와 밀회도 갖는다. 죄책감은 없다. 전공 분야의 석학인 중년의 남자와 나누는 화제는 육아나 가사와는 수만 킬로 떨어진 것들이다. 그녀가 열정을 쏟아붓고 싶었으나 출산과 육아로 인해 멀어졌던 학문과 관련된 이야기만 한다. 그녀는 일로써 존중받는다. 엄마나 아내로서가 아니라. 

레다는 3년 후에 집으로 돌아온다. 화가 많이 나 있던 남편은 그녀가 오자마자 이번엔 자신의 차례라며 보란 듯이 나간다. 그녀가 돌아온 이유는 소설에서 간단명료하게 서술된다.     


내가 창조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딸들과 견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내가 딸들에게 돌아간 이유는 내가 딸들을 떠났던 이유와 똑같아. 나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야.     


서먹서먹 눈치를 보던 아이들은 그때부터 성인이 되어 아빠가 있는 캐나다로 공부를 위해 떠날 때까지 엄마 레다와 함께 산다. 그 기간의 삶에 대해서는 영화에서도 소설에서도 이렇다 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모녀간에 일어날 수 있는 투덕거림, 자라면서 점차 엄마를 구식으로 보는 아이들, 아이들의 성장과 동시에 퇴보하는 부모 세대의 풍경 등이 조금씩 드러날 뿐이다.     

유년기에 있어서 3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전부라 할 수도 있다. 그 중요한 시기 엄마의 부재에 대해 딸들이 원망을 품었을 법도 한데 그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다. 아이들은 내면에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레다의 딸 비앙카와 마르타는 레다가 그렇듯이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있겠지만 무엇으로도 대체되지 않는 각자의 특성을. 

미성숙하고 혼란스럽고 불안한 엄마의 존재를 그들도 어리지만 알아챘을 것이다. 아이들은 맹목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한다. 특히 그의 몸을 뚫고 나온 엄마에게 더 그렇다. 생존본능일 것이다. 그 사람을 떠나서는 생존과 애정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걸 선험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떠나려는 엄마를 붙잡아 오렌지를 내밀며, 끊어지지 않게 껍질을 깎아 뱀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평소 했던 놀이를 도구 삼아 엄마가 있어야 마땅한 자리를 상기시키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결국 자신들의 삶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이미 사춘기 때부터 정신적으로 부모를 떠나려 한다. 더 지나면 부모를 부담스러운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저들이 필요한 순간만 부모를 찾을 뿐, 그 외 대부분의 시간 자신의 삶을 산다. 엄마가 걱정해서 하는 말조차 성가셔하며. 부모로부터의 독립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영화와 소설에서 니나의 딸 엘레나의 인형이 갖는 메타포는 무엇일까. 소설에서 그 단서가 되는 부분을 찾았다.   

  

인형은 니나와 엘레나의 사랑을 품고 있었다. 그들 모녀의 서로에 대한 열정과 구속력을 품고 있었다. 인형은 평온한 모성의 눈부신 증거였다.


나는 인형을 품에 안았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망가뜨리고 잃어버렸던가. 지금 이 순간 내가 망가뜨리고 잃어버린 모든 것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 모든 형상이 소용돌이치며 눈앞을 스쳐 갔다. 순간 내게 나니를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두렵기도 하고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인형을 갖고 싶었다.     


엘레나가 어떻게 보면 엄마보다 더 집착하는 대상인 인형은 레다가 보기에 더럽고 추하다. 엘레나는 인형의 입속으로 흙탕물을 흘려 넣고 급기야 태아를 연상시키는 벌레를 집어넣는다. 인형의 입에서 끝도 없이 토해져 나오는 더러운 흙탕물은, 임신 중 입덧 때문에 위장의 내용물을 게워내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몸속에 착상된 이질적인 존재를 밀어내려는 것처럼도 보인다.      


인간과는 거리가 먼 그 물질은 자기가 영양분을 취하고 팽창하기 위해서라면 나를 생명 없는 썩은 시체로 만들어 놓을 기세였다. 시꺼먼 침을 뱉어내는 나니의 모습은 둘째를 임신했을 때 내 모습 같았다.     


아이는 어딜 가든 인형을 분신처럼 가까이에 둔다. 엘레나는 자신의 가슴에 인형 나니를 밀착시켜 젖을 먹이는 시늉을 한다. 그걸 엄마 니나가 돕는다. 그런데 인형 나니는 예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니나가 함부로 취급해서 더럽다. 

엘레나를 잃어버리는 소동 끝에 레다는 엘레나를 찾아주고 대신 인형을 몰래 가져온다. 숙소에 와서 인형을 살펴보고 씻기고 새 옷을 사 입히면서도 스스로도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돌려줘야지 하고 몇 번이고 생각하나 이상하게 내면의 무언가가 잡는다. 레다는 인형을 훔치는 행위로 젊은 한때 자신이 내버렸던 모성에 집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엘레나가 애지중지 집착하는 인형을 그의 품에서 억지로 격리하는 행위는 단순히 심술궂은 행동이 아니라, 엘레나와 니나가 징글징글한 모성 신화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란 것일까. 더러운 인형을 씻기고 엘레나가 인형의 몸에 함부로 칠해 놓은 사인펜 자국을 지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는 행위는 딸들이 엄마의 불안과 걱정과 책임감으로부터 독립해서 멋지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을 기원하는 의식일까, 혼자 생각해 본다.    



 

니나의 모자를 브로치로 고정해 주는 레다(올리비아 콜맨 분)


레다는 니나와 젊은 시절의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녀의 불안과 불행을 알아보고 멀찌감치에서 관찰하다가 점점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친해지고 싶어 한다. 

이탈리아도 우리나라처럼 대가족 중심에 가부장적인 면이 있다. 다혈질의 성격에 가족 단위로 움직인다. 일주일에 한 번 해변의 별장으로 아내와 딸을 보러 오는 니나의 남편은 레다가 보기에 니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니나는 속마음과 다르게 남편 앞에서 연기를 한다. 니나의 시누이 로사리아는 니나의 곁에서 그녀를 주시한다. 니나가 레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고 자기들 눈을 피해 그녀와 접촉한다는 걸 눈치챈 로사리아는 레다를 경계한다. 레다에게서 모종의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레다가 3년간 딸들을 버렸다는 얘기를 니나와 로사리아에게 들려준 이후로 경계심은 적의로 바뀐다. 레다도 내색은 하지 않지만 로사리아가 싫다. 초면에 만삭인 그녀에게 자식은 언제나 걱정거리라는 말을 한다. 그녀는 니나를 제외한 그 가족 모두가 무례하고 천박하다고 속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나폴리 사람들이다. 사실 레다의 고향도 나폴리이다. 레다는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한 나폴리 친척들이 무식하고 감정적이라는 이유로 싫었고, 그래서 성인이 되자마자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 피렌체로 갔다.      


해변에는 비치하우스에서 일하는 대학생 지노도 있다. 레다는 그곳 사람들과 다르게 친절하고 사려 깊은 지노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는다. 동시에 그와 딸들을 머릿속에서 연결하여 어울리는지 생각하는 자신을 머쓱하게 바라본다.

레다는 지노가 니나를 마음에 두고 있으며 니나의 남편과 시집 식구들 몰래 만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하기야 니나는 유부녀나 아기 엄마라는 사실을 지우고 보면 누구나 반할 만큼 아름답다.      


니나도 해변에서 레다를 본 첫날 그녀를 의식하고 그녀에게 끌렸다. 둘은 닮은꼴이다. 

영화에서는 히치하이커 불륜 커플로 잠깐 등장하지만 소설에서는 꽤 비중 있게 다뤄진 브랜다라는 여성이 있다. 그녀는 레다가 젊은 시절 우연히 잠깐 만났으나, 이후 레다의 삶, 특히 집을 나가 있던 3년간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함께한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브랜다는 레다에게 잊지 못할 영감을 주었다. 레다는 브랜다와 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용기 있게 자신을 찾아가는 삶.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많은 일을 억지로 하죠.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이야말로 제 평생 일어난 단 하나의 유의미한 일이에요.     


실제로 브랜다는 레다가 혼란에 빠진 삶에서 나오는 계기를 제공한다. 하디 교수에게 그녀의 짧은 출간물을 보여준 것이다.(학업을 계속한 남편과 달리 육아 때문에 공부를 중단해야 했던 짧은 경력의 레다가 쓴, 길지 않은 기고문의 발췌문이었다. 어떤 생각에서인지 브랜다와 헤어질 때 그녀에게 그걸 주었다. ) 

그런데 니나에게 있어서 레다가 브랜다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도시풍의 세련된 중년 여자를 니나는 처음부터 의식했다. 그리고 레다가 브랜다에게 품었던 것과 똑같은 동경을 품는다.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어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가부장적인 남편과 시집 식구들의 세계에 갇혀 있으며, 모성이라는 무시무시한 본능이 생경하고 두려운 여자. 그 시기를 일찌감치 뛰어넘어 홀로 여행을 떠나온 중년 여성에게서 어떤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서로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으며 친구가 될 수도 있었던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끝난다. 영화의 막바지에서 지노와 함께 있기 위해 숙소 열쇠를 받으러 온 니나에게 레다는 아무렇지 않게 인형을 건넨다. 며칠 동안 잃어버린 인형 때문에 절망에 빠져 울기만 했던 엘레나. 그 때문에 미칠 것 같은 시간을 보낸 니나는 심상하게 인형을 내미는 레다가 괴물 같아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레다가 시장에서 사서 선물한 브로치의 긴 바늘로 레다를 공격한다.



소설 결말부에서 레다는 병원 침상에 누워 자신이 한 일이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행동이었음을 깨닫는다. 휴가 기간에 레다는 이상한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강렬했으면서도 이후 외면해 왔던 시기를 관통하는 경험이었다. 어지러운 환상 같기도 하고 악몽 같기도 했던 한 시기. 레다는 낯선 해변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가장 취약하고 숨기고 싶은 얼굴을 직면했다. 

병실에선 이제는 다 큰 딸들이 막 도착해서 엄마 걱정을 하고 있었다.


( * 리뷰 제목은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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