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어버이날을 떠올리며
‘해피 어버이날!’
가족 단톡방에 딸의 짤막한 문자가 이모티콘과 함께 떴다. 이어서 아들이 하트로 저글링을 하는 곰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아이들에게는 어버이날이 모종의 의무를 떠오르게 하는 무거운 날이 아니라 축하해야 할 행복한 기념일인 것 같다. 서로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는 기념일이라, 나쁘지 않다.
그래도 청장년 층에게 5월은 여러모로 버거운 달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 나이 때 양가 부모님에다가 아이들, 선생님까지 챙기느라 마음도 지갑도 바빴다. 나이가 들면 편한 점이 셀 수 없이 많은데, 챙겨야 할 무슨 무슨 날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점도 그중 하나다. 편한 건 사실인데 헛헛한 순간도 많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에게 했듯이 축하를 드리고 싶어도 그걸 받아줄 부모님이 세상에 없다.
남편과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모님들을 보내 드렸다. 이제 두 사람 다 고아가 되었다. 삶의 마지막 여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신들의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죄스러웠다. 잔인한 일이었다.
최근에는 친구의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늘그막에 절친이 된 친구의 시부모님은 서로를 챙기고 때로 아웅다웅하며 집에서 잘 지내고 계셨다. 어느 날 아버님이 급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셨고, 병원에 입원한 지 사흘 만에 돌아가셨다. 편안한 죽음이라는 게 있겠냐만, 문상객들은 당신 자신도, 가족들도 고생을 덜어서 호상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나는 무엇보다 요양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연휴에 서울에서 내려온 딸을 데리고 어버이날 인사차 시어머니를 뵈러 간 친구의 얘기를 듣다가, 나는 작년 어버이날을 떠올렸다.
1년 전 엄마는 요양병원에 계셨다. 컨디션이 좋으실 때는 어눌하게나마 우리와 짧은 대화도 나눌 수 있었던 엄마가 그즈음엔 단어가 미처 발음이 되어 나오지 못해 “아아, 아아.” 하는 소리로 본인만 아는 말씀을 하셨다. 거기다 엄마는 요양병원에 들어갈 당시 이미 시력을 상당히 상실한 상태여서 얼굴을 눈 가까이 가져다 대야 우리를 알아보셨는데, 그즈음은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시력마저 잃어서 눈을 떠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엄마의 고통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못나고 이기적인 딸은 그저 엄마의 귀에 대고 늘 똑같은 말을 들려줄 뿐이었다.
엄마, 힘들지?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요. 우리는 다 잘 지내요. 걱정하지 마세요.
손을 잡아 드리고, 머리를 쓸어 드리고, 뻣뻣하게 굳어가는 사지를 주물러 드리는 게 해드릴 수 있는 전부였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동생과 통화를 하다가 카네이션 화분을 사가겠다고 하니, 동생은 꽃을 갖다 놓아도 보지도 못하실 텐데, 했다. 결국은 나는 나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면회 때마다 가져가던 음식에 한두 가지를 더해서 넣어드렸을 것이다. 병원에 들어가시고 해가 바뀌면서 1년에 한 번뿐인 어버이날이나 생신에, 엄마가 보지 못하고 말씀도 못 하신다는 이유로 소홀하지 않았나 엄마한테 미안하다. 일상의 갈피마다 순간순간 엄마에게 미안한 이유가 쌓여 간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일곱 달이 지났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울컥, 엄마한테 미안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리고 엄마의 어떤 모습이나 행동이 오래된 영화의 장면처럼 떠오른다. 가장 간절하면서 감정을 건드리는 건 엄마의 음식들이다. 딸들에게 주려고 국물이 샐 정도로 꾹꾹 눌러 담은 김치며, 커다란 반찬통 가득 든 반찬들, 한 솥 끓여서 냉동실에 봉다리 봉다리 얼린 엄마표 들깨 시래깃국, 그 옆에 일일이 손질해서 얼려 놓은 생선 뭉치들.
엄마는 내가 모르는 곳으로 홀연히 떠나셨지만, 이렇게나 많은 모습으로 내 옆에 계신다.
“애도라는 것은 단순히 슬픔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슬픔은 사라지고 일상에서 그와 함께하는 것이죠.” - 정용준, <밑줄과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