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인연

나의 단골 미용사

by 들국화

이번 주는 롯데백화점 휴무일이라 문화센터 수업을 마치고 가까운 데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오늘은 두 사람이나 빠져서 단출했다. 바깥으로 나서니 햇볕이 후끈했다. 비는 완전히 물러나고 여름답게 더울 일만 남았나 보다. D 언니가 이끄는 대로 초밥 식당으로 가서 점심 특선을 먹었다. 메밀 소바에 초밥, 튀김, 일본식 계란찜 차완부시까지 푸짐한 한 상이었다. 초밥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내 입에도 맛있고 건강한 맛이었다. 센텀 쪽에 맛집이 드물다는 건 내 경험이 얕아서임을 인정했다. 다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와 배가 고팠던 시점이라 포식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회합 장소 하나가 추가되었다.

건널목을 하나 건너 그 옆 건물 1층 메가커피에 들어가서 또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섯 명이 모이면 주제가 하나로 모이기가 힘들다. 네 사람이 되니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더 깊고 사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살아가면서 알아두면 좋은 실용적인 팁이나 먼저 경험해본 사람의 현실적인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 건물 2층에 단골 미용실이 있어서, 온 김에 올라가서 염색을 하고 갈까, 잠깐 고민했다. 일어나기 전에 언니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정수리를 보여주었다. “염색해야 할까요?” “조금 올라오기는 했네. 그런데 전화해 보고 가야 하지 않나?” 그래, 조금만 더 버텨 보자. 나는 마음을 접고 언니들과 함께 건널목을 건넜다.





나의 단골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긴 지 20년이 넘었다. 프랜차이즈 미용실에서 한번 우연히 머리를 맡긴 이래로, 그녀가 일터를 옮길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나는 인간관계가 넓지 못하지만 한번 이 사람이다 싶으면 오래도록 의리를 지키는 편이다. 그녀의 커트 솜씨가 특별히 뛰어나다거나 헤어 스타일링이 세련됐다거나 한 건 아닌데도, 나는 그녀에게 내 머리를 믿고 맡긴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는 어깨까지 오는 굵은 파마 스타일을 오래 고수했다. 나이가 들면서 머리가 치렁하면 사람이 더 처져 보여서 머리 길이가 점점 짧아졌고 지금은 짧은 단발 정도에서 정착하고 있다. 머리카락이 일찍 세셨던 아버지를 닮아 30대부터 새치가 나기 시작했는데 언젠가부터 새치라고 우길 수 없을 만큼 흰 머리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녀가 일하는 미용실에서 5회 금액권을 끊었고, 파마와 염색을 번갈아 했다. 퇴직 후에는 공식적으로 예의를 갖춰야 할 일도 없고 사람 만날 일도 적어지면서 미용실에 가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이젠 도저히 참을 수 없겠다 싶은 정도가 되어야 예약을 잡는다. 흰머리는 3주만 지나도 삐죽 올라온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미용실에 간다면 비용이 만만찮다. 그래서 집에서 염색을 두 번 정도 하면 세 번째쯤 미용실을 찾는다. 단골이다 보니 파마를 할 때마다 눈에 잘 띄는 정수리 부분을 살짝 염색해 준다. 이래저래 돈이 안 되는 손님이지만 오래 알고 지내다 보니 띄엄띄엄 가도 반갑게 맞아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미용사의 수다가 느는구나 싶었다. 어느 때는 이분이 그동안 대화에 굶주렸던가 싶을 만큼 손은 내 머리에 둔 채 말 폭탄을 퍼부을 때도 있다. 그녀가 들려주는 얘기는 내게도 흥미로워 나도 모르게 집중하게 된다. 실이 풀리듯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듣는 일도 재미있네 싶다. 그건 내가 그녀의 이야기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가치관이나 성향이 나와 전혀 다르다면 이야기를 듣는 일이 고역일 것이다.


그녀가 처음부터 말이 많았던 건 아니다. 처음에 내가 그녀를 편하게 여긴 이유 중 가장 큰 게 말이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예전에는 미용실에 가면 하기 싫어도 스몰토크를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낯을 가리는 데다가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그런 분위기가 꺼려졌다. 그런데 그녀는 과묵하고 진중했으며, 쓸데없는 말로 내 시간을 방해하지 않아서 좋았다. 말없이 머리를 정성스럽게 만져줬고, 그녀에게 맡기면 머리가 상할 일은 없었다. 그랬는데 사람이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지나 보다. 멀리 갈 것 없이 나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녀의 변화를 나는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녀는 가수 박효신의 열혈 팬이자 뮤지컬 덕후여서 휴무일에 공연을 보러 서울에 다녀오는 일이 많다. 그녀는 또한 20대 초반의 인턴 직원에게도 말을 놓는 법이 없고 지시가 아닌 부탁 조로 말하는 사람이다. 계엄 이후 혼란스러운 시국에서는 나라 걱정이 많았다.


누군가와 우연히 맺은 인연을 오래 이어가는 일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미용사와 고객의 관계든, 어떤 관계든, 가끔 얼굴을 보는 사이라도 편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서로 어딘가 통하기 때문인데,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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