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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in Mar 22. 2023

거봐 내 말 맞지?

hwain 단편선 (2)

 '불합격하셨습니다.'


 지겹다. 지겨워. 저 폰트에 저 색깔. 5년째 불합격하는 나도 나지만, 5년 넘게 합격 조회 홈페이지 문구와 폰트도 바꾸지 않는 당신들도 참 대단하다. 대단해.

 이쯤 되니 내가 불합격한 이유도 잘 모르겠다.

 여자친구? 그런 건 애초부터 없었고. 친구들? 걔들은 직장 다니느라 수험생인 나보다 바빴다. 게임은 3번째 시험을 준비하면서 끊었고.. 제기랄. 그 흔한 핑계도 없구나 이젠.

 돌아갈 곳도 없다. 3번째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불합격을 위로해 주던 친구들과 다퉜고, 같이 준비하던 학원 사람들도 이젠 모두 합격했다. 가족들은.. 그래, 보지 않는 편이 낫겠다.

 내게 남은 건 밀린 고시텔 월세와 닳고 닳은 문제집들뿐.

 아무래도 나, 죽어야겠다.


 죽기로 결심한 것은 1교시 시험이 끝난 직후였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금 가채점을 마쳤다. 결과는 역시나다. 왜 신은 없을까. 있다면 5번 중 한 번의 기회는 주었을 텐데 말이다. 세상은 너무 과학적이고, 냉정하다.

 갑자기 배가 고픈 걸 보니 아직 세상에 미련이 남은 모양이다. 어떻게 죽을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으니 천천히 밥이라도 먹으며 생각해볼까 한다. 아니지. 오히려 배를 채운 상태로 시신이 되면 더 혐오스럽지는 않을까? 그래도 먹다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데.


 나는 결국 허기를 참지 못하고 배달어플을 켰다. 배달비가 너무 높아서 고시원에 직접 시키진 못하고 포장 주문을 걸어놓고 나왔다. 마지막 만찬은 햄버거. 번개탄을 사야 해서 세트는 못 시켰다.

 방에 들어와 햄버거 포장지를 벗기고 아직 식지 않은 따뜻한 빵을 앞니로 찢었다. 턱관절이 움직이는 모습이 닫힌 창문에 비쳤다. 곧 죽을 사람답지 않게 여유로워 보였다.

 고시원 냉장고에 보관해 둔 포도주스를 꺼냈다. 꽉 막힌 목구멍이 풀어지면서 싸구려 포도향이 올라왔다. 음식물이 목구멍을 넘어 쑥 내려가는 기분이 좋아서 잠시 살고 싶어졌다. 하지만 안 된다. 작년에 불합격했을 때도 그래서 죽지 못했다. 한번 경험해 보니 죽지 못해 사는 고통이 죽는 고통보다 더 강했다. 약해지지 말자. 죽을 용기로 살지 말고, 그대로 죽자.


 창문 틈으로 시원한 밤공기가 들어왔다. 왜 밤공기는 4계절 내내 산뜻할까. 봄에는 봄꽃 향기가 입혀져서, 여름에는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서, 가을에는 낙엽 냄새가 입혀져서, 겨울에는 붕어빵 냄새가 타고 와서. 계절로만 따져도 스무 계절이 넘도록 나는 수험생이었다. 그래서인지 20번 동안 밤공기가 좋은 줄 몰랐다. 이 밤공기. 내일 한 번만 더 맡으면 안 되려나? 아니야. 약해지지 말자. 차라리 죽어버려서 내가 밤공기가 되어버리자.


 창문을 닫고 연기가 나갈 구석을 모두 막았다. 빈틈은 옷과 책으로 막았다. 아, 유서를 깜빡했다. 뭐라고 쓸까. 가족 이야기를 가장 먼저 써야겠고, 어떤 특별한 이유 때문은 아니라고 적어야겠다. 오해를 살 수 있으니. 또 뭐를 적을까..

 적다 보니 a4용지 한 장이 충분하게 채워졌다. 내 글솜씨가 꽤 좋았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고3 때 논술을 준비할 걸 그랬나?라는 생각을 하며 수면제를 입안 가득 털어 넣었다. 근데 이건 누가 줬던 거지? 아, 지난주에 고시원을 나간 수환이 형이 준 거구나. 수환이 형은 공무원 월급이 너무 낮다며 포기하고 공장에 취직하러 떠난 사람이다. 잘 지내려나.

 

 이제 연탄불을 피운다. 칙-

 연탄이 빠르게 타면서 불과 연기가 무늬처럼 새겨진다. 그걸 보고 있으니 정신이 멍해지기 시작했다. 인스타에서만 봤던 불멍이 이런 건가. 기분이 차분해지고 불향이 좋다. 목이 찢어지도록 기침이 나지만 잠이 쏟아진다.

.

.

.

.

.

감투를 쓴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눈다.

“오, 진짜네요.”

“거봐 임마. 내 말 맞지?”

“아니 진짜 누가 죽인 게 아닌데 알아서 죽네요. 저는 사실 저 사람 이번엔 안 죽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선배님이 죽을 거라고 하셔서 누가 살해하거나 사고로 죽는 줄 알았어요.”

“내가 전에 말했잖아. 저 사람 전에도 엉엉 울면서 제발 한 번만 더 기회 달라고 싹싹 빌었어. 근데 난 그때도 단박에 알았지. 어차피 또 제 발로 돌아올 거라고. 전생에서도 자살했거든 저 사람. 쯧쯧.”

“근데요, 선배님. 혹시 저 사람 팔자대로면 공무원이 되나요?”

“응. 원래는 되는 팔자더라.”

“몇 번 만에요?”

“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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