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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in Mar 27. 2023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1)

hwain 단편선 (3)

 정우를 마지막으로 다섯 사람은 모두 깨어났다.


 올해로 18살인 정우부터 20대 여성 효진,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 여성 미정, 군복차림의 재성,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쓴 70대 명주까지.


 다섯 사람에게 공통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단 한 가지, 왼쪽 발목에 두툼한 쇠사슬이 묶여있다는 사실 말고는.


 정우가 눈을 떴을 때 넷은 이미 서로 통성명을 마친 것으로 보였다. 그는 자신의 뒷머리가 따뜻한 액체로 젖어있는 것을 느꼈다. 따뜻하고 끈적한 액체. 그리고 그 액체의 출처가 본인의 뒤통수라는 것도 곧 알 수 있었다.


 “으악!”


 정우의 외마디 비명을 들은 네 사람이 정우를 바라보았다.


 “얘야, 괜찮니?”


 미정이 정우를 걱정했다. 정우는 얼떨떨한 정신을 부여잡고 다리를 끌어당겨 앉았다. 한쪽씩 묶인 다리 때문에 다섯 사람의 앉은 자세는 비슷했다.


 “여기가 어디죠?”


 정우는 천장부터 벽, 바닥을 검은 눈동자로 훑었다.


 “우리도 모른다. 너는 이름이 뭐니?”


 “정우요. 조정우예요.”


 “정우야, 우리도 방금 일어나서 잘은 모르겠다만, 아무래도 우리 모두 납치된 것 같구나.”


 가래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영감이 말했다. 폐가 온전해 보이지 않는 목소리다. 정우는 그 음성을 듣고 폐암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가.. 감사합니다. “


 정우는 앉은 채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발목에 쇠고랑을 차고 고개를 조아리는 그 모습이 마치 석고대죄하는 죄인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 우리 서로 마지막 기억을 생각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


 왼쪽 가슴에 막대기 3개가 쌓인 그림이, 그 반대편에 ‘한재성’이라는 이름이 적힌 남자가 말했다. 넓은 턱과 벌어진 어깨가 그의 건장함을 대변했다.


 “그래요.. 저도 한번 생각해 볼게요.”


 정적을 깬 것은 효진의 떨리는 음성이었다. 다섯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일제히 눈을 감고 자신의 기억을 복기했다.


 노인은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음량의 목소리로 속삭였고, 주머니에 볼펜이 들어 있던 군인은 나무 바닥에 타임라인을 적었다. 바로 옆자리 정우의 눈에 ‘야간 순찰’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5분쯤 지났을 때 정우가 고개를 들었다.


 ”저, 저는 집에서 게임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니면 인터넷 서핑이죠. 제가 자퇴를 해서 매일 컴퓨터만 하거든요. “


 “저는 후임이랑 야간 순찰을 돌았던 것 같습니다. 시계도 02시 07분에 멈춘 것을 보니 딱 야간 순찰 시간입니다.”


 화면이 깨진 시계를 흔들며 재성이 정우의 말했다.


 “저는 흐릿하게 기억이 나긴 하는데, 아마 고양이 밥을 주고 있었던 것 같아요. 시간은 대충 초저녁이었던 것 같네요.”


 미정의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노인네 기억이 가장 못 미덥겠지만, 나도 집에 있었어. 분명 컴퓨터 학원에서 배운 거 복습하고 있었는데..”


 무엇 때문인지 재성은 갑자기 웃음을 참았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이 나질 않네요..”


 효진의 얼굴이 침울하게 구겨졌다.


 “괜찮아요. 이제 맞춰가면 되죠 뭘. 근데 우리 공통점이 전혀 없네요.. 사는 지역이라도 맞춰볼까요?”


 초반에 조용했던 미정이 열정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미정의 진두지휘 하에 다섯은 주소부터 활동 반경, 직업, 심지어 최근에 누군가의 원한을 샀을 법한 기억까지 꺼냈다.


 ”아니, 이렇게나 공통점이 없을 수가.. “


 “심지어 나쁜 짓을 한 사람도 없네요.”


 ”이 정도면 너무 평범하고 착한 사람들만 모인 거 아닌가요? 아, 너무 착해서 잡힌 건가? 하여간 요즘 세상은 착한 게 죕니다, 죄.”


 재성 특유의 능글맞은 목소리에 하나둘씩 웃기 시작했다. 정우와 효진은 웃지 않았다.


 “그나저나 영감님은 괜찮으셔요?” 재성도 웃음을 멈추며 물었다.


 “괜찮을 리가. 벌써부터 추워. 나만 추운 건가? 바닥이 조금 차갑지 않어?”


 명주가 몸을 떨면서 말했다. 육포처럼 말라비틀어진 입술색에 점점 보랏빛이 돌기 시작했다.


 ‘철컥’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치는 천장이었다. 정확히 다섯 사람의 중앙에 종이 상자가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다섯 중 그나마 팔다리가 긴 재성이 몸을 구부려 상자를 자기 쪽으로 끌었다.


 “뭐해요, 얼른 열어봐요.” 미정이 말했다.


 “이거 진짜 뭐지.. 몰카 아니야..?” 재성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종이 한 장, 톱, 그리고 타이머가 있었다. 재성은 상자를 탈탈 터는 시늉을 네 사람에게 보여준 뒤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아래 조건을 모두 충족할 경우 여기서 나갈 수 있습니다.]


1. 총 10개의 손가락을 자를 것. (한 사람이 모두 잘라도 됨.)

2. 손가락을 자른 사람은 죽으면 안 됨. (전원 생존해야 나갈 수 있음.)

3. 1시간 내에 나가지 못하면 유해가스 분출. (전원 사망함.)


 재성은 처음엔 웃었지만 조건을 읽을수록 표정이 굳었다.


 ”아, 형 제발 장난치지 마세요.. 진짜 무섭단 말이에요. “ 정우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노인네 놀리면 못 써.. 나라 지키는 군인이 그런 장난을 치면 안 되지.. “


 ”진짜 장난 아니에요. 제가 던질 테니까 다들 받아서 읽어 보세요!”


 재성은 종이를 구겨서 정우에게 던졌고, 정우는 미정에게, 미정은 효진에게 던졌다. 마지막에 받은 명주는 안경을 코 밑까지 내리며 천천히 읽었다.


 충격적인 내용에 정우의 바지가 짙은 색으로 젖었다.


 “아이고, 어쩜 좋아..”


 미정은 눈을 감고 흐느껴 울었다. 미정의 울음소리 뒤로 재성이 머리를 박박 긁는 소리가 들렸다.


 “씨발 진짜 뭐 하자는 거야!”


 재성은 천장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른 뒤, 톱으로 사슬을 마구 문질렀다.


 사슬은 멀쩡했고, 톱날은 뭉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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