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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in Apr 10. 2023

도그파이트

hwain 단편선 (8)

 세로로 길게 뻗은 동네의 중앙에는 낡은 시계탑이 있다.

 형욱은 시계탑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동네의 랜드마크 격이었던 시계탑은 이제 자신이 맡은 본분을 다했는지 미동도 않는다. 덩그러니 남겨진 몸통은 그마저도 색이 벌겋게 바랜 것이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형욱은 두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셋은 16년 지기 부랄 친구다. 다 같이 이 동네에서 자랐고,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다. 셋은 거의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는데 형욱이 혼자서 대학에 가지 않고 취업에, 게다가 결혼도 금방 해버리는 바람에 성인이 되고 난 이후로는 이산가족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완전히 연락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고 셋이 동네로 모여드는 명절이나, 오늘처럼 형욱의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처가에 다녀오는, 기막히게 운 좋은 날이면 틈틈이 뭉칠 수 있었다.


 "아, 언제 오는 거야.." 형욱이 세 번째 담배꽁초를 벽돌 바닥에 문질렀다. 시계를 보니 40분 정도 기다렸다. 저 멀리 모터 소리가 들렸다. 재연의 오토바이다. 형욱은 얼마 전 SNS에서 재연의 오토바이 사진을 봤다.


 "어이~ 브라더." 재연이 헬멧을 벗으며 말했다. 사이즈가 통 안 맞는지 귀가 빨갛다.


 "넌 어떻게 된 놈이 맨날 늦냐. 맨날." 형욱이 눈빛을 쏘았다.


 "미안하다. 크루들이랑 잠깐 어디 좀 다녀오느라." 재연은 사이드미러를 보며 깻잎처럼 달라붙은 앞머리를 가다듬었다.


 여기서 재연이 말하는 크루는 매번 다른 사람들인데, 어떤 날에는 독서모임 크루, 어떤 날에는 클래식 바이크 크루, 그리고 또 어떤 날에는 브랜딩 인사이트를 공유하는 모 크루였다. 언젠가 형욱이 재연에게 이 '크루'라는 것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물었지만 재연은 '영감과 영혼을 나누는 모임'이라며 얼버무렸다.


 "여어~" 보닛 위에 정확히 삼등분된 원이 각인된 검은색 외제차에서 내린 남자가 소리쳤다. 정훈이다.


 "오, 훈이 왔냐." 재연이 정훈과 주먹을 맞대며 인사했다.


 "늦어서 미안, 주말에도 퇴근 시간은 막히네. 밥은 먹었냐들?" 정훈은 캐주얼한 재킷에 통이 넓적한 청바지를 입고 발등이 황토색으로 그을린 빈티지 구두를 신었다. 그에게서는 젖은 나무 향이 풍겼다.


 형욱은 이미 젊은 사람들은 모두 떠나 찾아보기 힘든 이 조그만 동네에 멋을 부리고 나타난 정훈의 꼴이 몹시 보기 싫었다.

"어휴, 동네에서 맥주 한잔하자니까 왜들 이렇게 꾸미고 왔냐?" 형욱이 슬리퍼를 질질 끌며 말했다.


 "야, 우리도 이제 서른 살 아저씨다. 조금이라도 꾸며야 아재 소리 안 듣지. 안 그러냐 재연아?" 정훈이 도움을 요청하듯 재연에게 형욱의 화살촉을 넘겼다.


 "야 이 자식야, 니 패션이랑 내 패션이 같냐? 나는 고프코어룩이고 임마. 넌 뭐냐 그게. 결혼식 가냐? 하여간 무조건 흰 셔츠에 넥타이를 매야지만 옷 잘 입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우린 그들을 아재라고 부르지."


 "뭐 임마? 이게 얼마짜린 줄은 아냐? 이걸로 니 오토바이 열 대는 살 수 있어."


 형욱의 눈에는 재연도, 정훈도 도긴개긴이었다. 재연은 가슴팍에 공룡을 좋아하는 형욱의 딸도 못 맞출 것 같은 공룡뼈가 그려진 바람막이를 가리키며 이 옷이 중소기업 직장인 한 달 월급 수준이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싸우더라도 일단 가서 싸워." 형욱이 두 사람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상가 쪽으로 이끌었다.


 "아, 여기 로티세리 바베큐 치킨 파는 곳 없냐?" 갑자기 재연이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뭐? 무슨 바베큐?" 형욱은 정말로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로티세리 바베큐. 기름기 쫙 빠진 치킨 있어. 칼로리 무지 낮아서 건강에 좋아. 맛은 더 좋고." 재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폰을 열어 음식 사진을 보여줬다.


 "아참, 내가 요새 바프(바디프로필) 준비하거든. 이제 2달 조금 넘게 남아서 이제부터는 식단 관리를 더 철저히 해야 해." 재연이 바람막이 지퍼를 내리더니 가슴팍을 열어젖히며 자신의 가슴팍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모였는데 삼겹살 집에 가서 소맥이나 한 잔씩 푸자. 나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 그리고 넌 무슨 우리 동네에서 로티인지 제티인지 하는 걸 찾냐. 제정신이야? 이 촌구석에서." 형욱이 지친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의 말투와 표정에는 간절함을 넘어 애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무슨 바베큐 치킨 타령이야. 아무튼 우리 오늘 2차까지 가는 거지? 2차는 무조건 양주 먹어야 된다? 여기가 아무리 촌이어도 글렌피딕은 있겠지?" 옆에서 조용하던 정훈이 입을 열었다.


 "글렌피딕? 그건 또 뭔데."


 "야, 형욱아. 너 아무리 애 키우느라 바빠도 즐길 건 즐기고 살아라. 사슴 모양 몰라? 그게 향이 얼마나 좋은데.." 또 재연이 끼어들었다.


 "아, 제발 니들 지랄 좀 하지 마. 그냥 삼겹살에 소주 마시면 안 되겠냐고. 너네도 다 좋아하잖아, 이거." 형욱의 눈에서 눈물이 맺힌 것 같았다.


 그러자 재연이 뭔가를 생각해 냈다는 듯이 말했다.


 "아, 나 식단관리 해야 되는데. 잠시만, 이 근처에 목살 파는 집은 없나? 목살에는 지방 함량은 적고 단백질이 좀 더 많잖아. 그러면 삼겹살 집에 가서 목살도 파는지 확인해 보자. 어때?"


 "그래, 그러면 콜키지 되는 곳도 알아보자. 내가 트렁크에 회식 때 먹다 남은 양주가 좀 있거든? 그게 돼지고기랑 페어링이 잘 되거든." 이에 정훈도 신이 나서 대답했다.


 "오, 이름이 뭔데?" 둘은 갑자기 양주에 대한 각자의 지식을 나누기 시작했다. 향과 바디감부터 시작해서 본인이 좋아하는 향까지. 한쪽이 위스키의 이름을 대면 다른 쪽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황급히 다른 위스키의 이름을 댔다. 둘의 이야기는 흐르지 않고, 뚝뚝 끊어지는 것을 반복하며 꾸역꾸역 이어졌다.


 "너 글렌피딕이 왜 MZ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는지 알아? 그게 다 마케팅 전략이야. 걔네가 브랜드 이미지부터 시작해서..."

 세 사람은 목적지 없이 거리를 배회했다. 재연과 정훈은 웃고 있었지만 형욱의 눈에 그려진 두 사람은 아슬아슬해 보였다. 현실에서 동 떨어진 삶을 살지만 누구보다 미래지향적인 두 사람의 대화. 마치 두 눈을 가린 채 외줄을 타는 곡예사들의 대화 같았다.  


 "저, 얘들아. 그래서 우리 어디 가서 밥 먹을 거라고?" 형욱이 두 사람의 얕고도 깊은 대화를 방해하며 물었다.


 "어.. 그러게. 우리 뭐 먹기로 했지?" 재연이 동공을 흐리며 답했다.


 "그러게. 형욱이 너 좋아하는 걸로 먹자. 뭐 땡겨? 이제 여기는 너 나와바리잖아. 우린 이제 여기 떠난 지 10년 되어간다." 정훈은 선심을 쓰듯 말했고, 재연은 "벌써 그렇게 됐냐? 시간 진짜 빠르네."라며 맞장구를 쳤다.


 "야 이.." 욕을 내뱉으려던 형욱에게 전화가 왔다. 와이프다.


 "잠시만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형욱은 무리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곧 돌아왔다.


 "얘들아. 미안하다. 애기가 열이 올라와서 와이프가 돌아오고 있다고 하네. 다음에 밥 한 끼하자. 내가 살게 다음에." 형욱은 두 사람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뛰어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형욱의 갑작스러운 이탈로 두 사람 사이에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아. 그러면 우리끼리 밥이나 먹고 들어가자." 정훈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래 그래. 뭐 먹을래?" 재연은 당황하면 대답을 두 번씩 하는 버릇이 있다. 재연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알림의 흔적은 없었지만 화면을 쓸었다 올리며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음, 너 먹고 싶은 거 먹어. 난 별로 배가 안 고프네." 정훈도 갑자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에게도 딱히 어떤 연락이 온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낡은 시계탑이 바람에 삐그덕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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