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사는 것 같다. 그럴만한 이유? 혹은 환경?들이 사실은 있는 편이긴 한데 우선 땅 덩어리가 작고 서로 다닥다닥 붙어 사는 주거환경 때문에 누가 어떻게 사는지 가시적으로 너무 잘 보인다는 점.(요즘은 SNS가 잘 되있어 내가 전혀 모르는 아주 먼 곳의 사는 사람들의 삶까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디선가 한국만의 독특한 정서(?)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전국 적으로 비가 옵니다”같이 전국의 날씨가 다 같을 수 있는 나라가 거의 한국이 유일무의하다는 것이다.(나도 별로 의식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신기해서 기억에 남는다.)그 것은 '한국 사람은 하나’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심어주게 되는데('한민족'이란 표현이 있듯)그 생각은 한국 사람들의 '단결력'에서도 들어나기도 하지만 '같은 하늘' 아래 너무도 다른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한 ‘이질감’을 못 견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이건 그 강의를 듣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부분이다.)
사실 조금은 다른 한국만의 정서는 속담에서도 알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가 그 것이다. “아니 사촌이 논을 사면 축하해 줘야지 왜 배가 아파요?”라는 강사님의 멘트에 빵 터진 기억이있다. 아예 모르는 남이면 이해한다 치지만 그래도 핏줄인 사촌이 논을 사는게 왜 배가 아프냐는 것이다. 나도 ‘그러고보니 그렇네’하면서 공감이 됐다. 번 외로 “남의 떡이 커보인다”같은 속담에서도 볼 수 있듯 우리는 남과 비교하는 것이 이미 DNA(?)에 심어져서 태어나는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도 한다.
사실(?)관계는 뒤로하고 어쨌든 이런 저런 이유로 한국 사람들은 사람들의 눈을 많이 ‘의식’하며 살고 있다는게 결론이다. 그러다 보니 특별히 ‘명품’이나 ‘좋은 차’같은 특정 브랜드의 인기가 높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호갱’(호구인 고객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비싸게 팔지도 않는 제품인데도 유독 한국에서는 몇 배로 비싸게 팔기도 하고 심지어 가격을 올리면 올릴수록 더 잘 팔린다는 것이다.
이제 SNS를 통해 사소하게 맛집,커피숍,취미생활에 대한 내용부터 ‘호캉스’,‘Flex’(돈 쓴 자랑)까지 ‘나만 못 사고(buy) 나 만 못 누리나?’란 생각이 들 만큼의 내용들이 쏟아진다. 어떤 이는 ‘상대적 박탈감’을 못이기고 SNS를 끊어버렸다고 하기도 한다.(사실 별로 하지도 않았지만 가끔 들어가는데 저런 꼴(?)을 봐야한다고)
한 번씩은 ‘SNS의 현실’이란 게시물을 통해 생각보다 ‘보여주기’위한 설정 혹은 과장일 뿐 ‘실제’는 보는거랑 다르다는 내용들이 올라오기도 하는데 ‘사실’이든 ‘과장’이든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목적이라는거 하나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보여주고’싶다는 건 결국은 상대의 눈을 ‘의식’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때로는 너무 상대의 눈을 의식하느라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살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다. (간혹 본인 의지가 아닌 부모님의 강요 때문에 그런 삶을 사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비교병’이 걸리기도 한다.)나의 삶은 나의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데 왜 그리 상대를 의식하고 또 의식하느라 나의 삶을 망쳐버리기까지 한다는 말인가.....
그런데 사실은 말이다. 사람이란 그 존재 자체가 사실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아니 어쩌면 훨씬 더)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내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의식이지 않은가? 의식의 주최는 사실 ‘나’라는 사실 말이다.
맞는 예시(?)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어렸을 때는 나와 가장 절친이였던 친구 몇들은 나의 인생에 큰 결정에 대한 도움(?)이 될꺼라 확신한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정말 아닌 사람과 만나거나 결혼하려고 하면 당연히 싸말려줄 거라고 한번은 헤어지고 나서 그 사람에 대한 욕이랑 욕은 친구에게 다 퍼부었는데 한달 쯤 뒤 그 사람이랑 다시 만나게 된 일이 있었다. 얼마나 욕을 했는지(?) 다시 만난다는걸 친구에게 알리는게 머슥할 정도였는데 친구는 “그렇게 욕을 하더니 왜 다시 만나?”라는 그 비슷한 질문조차도 내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로서 완전히 헤어졌을 때야 말로 “그래 헤어지고 욕을 하더니 다시 만날 때 내가 알아봤다.”하고 한 마디 던지는 것 뿐이였다.
물론 친구는 아무리 내가 욕을 퍼부었어도? 차마 만나고 있는 사람에 대해 안 좋게 말하는 것은 예의도 아니며 자신이 참견할 만한 자격(?)도 없다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괜히 본인 때문에 다시 만난게 깨지면 자신한테 원망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친구 본인 자신도 느끼지 못한 저 깊은 곳 안에는 ‘아무리 친구라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뿌리가 있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나든 안 만나든 실제 친구에게는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게 사실이니 말이다.(그 전처럼 헤어진 후에 푸념이나 들어주면 될 일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어떤 관심도 가지지 않게 작동되어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생존본능(?)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들을 고민하고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 만으로도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나와 관계 없는 것은 자연스럽게 배제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남’에게 생각보다 관심이 없다는 건 여러 책을이나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카네기 인간관계론’에서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모든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명성 높은 지도자의 이야기가 있는데(물론 이 것만 가지고 명성 높은 지도가가 된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모든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큰 영향을 끼쳤다.)높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낮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지만 이 지도자는 그 모든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었던 것이다. 그 것은 그 지도자가 아주 낮은 곳에 있는 사람도 진성성 있게 생각하고 대한 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또 영업을 잘 하는 비법으로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표현하라는 것이 있었는데 상대가 했던 얘기를 놓치지 말고 고객노트에 적어두었다가 “저번에 말씀하신 그 일을 어떻게 되었어요?”하고 물으라는 것이다. 자녀가 있는 집이라면 자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안부를 묻는 것도 좋고 혹시 반려동물이 있다면 그 동물의 이름을 기억하고 얘기를 꺼낸다면 반드시 상대는 당신에게 호의를 느끼고 당신의 ‘충성고객’이 될 거라고 말이다.
그런 조언들이 책에 실려 있다는 뜻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다는 태초(?)적인 관심 조차도 없는 이들도 수두룩하다.(세상에 ‘지’만 아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심지어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영향을(?) 아예 안 미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하다못해 내 사무실은 더 신경써서 깨끗하게 치워주지 않겠냐는 말이다.)
그렇듯 사람은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사람에 대해서는 ‘큰’관심이 없다. 반대로 가족(부모,형제,자녀 등)나의 삶의 크고 작은 영향을 주는 관계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관심을 가진다.(어느 가정은 너무 과도한 관심을 주기도 한다)하지만 때로는 피를 나눈 가족도 관계도 너무 안 좋아서 깨어지면 남보다도 못한 지내거나 아예 인연을 끊고 살기도 하는데 (가족끼리 법정까지 간 이야기도 수두룩하게 보기도 하지않는가)처음부터 ‘남’인 존재는 어떠랴
누군가 집에 정수기 아저씨(아줌마) 같이 잠시 다녀가는 사람만 집에 오더라도 집을 다 치워야해서 너무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진짜 손님이 오실때는 대청소를 하다보니 손님이 오시는게 부담스럽다고, 물론 손님이 오시면 어느정도 치우는게 예의인 것은 맞지만 오는게 부담스러울 정도라면 차라리 안하는게 낫지 않을까?
사실 잠시 들리는 정수기 아저씨(아줌마)들은 자기 맡은 일을 하고 가기 바빠서 집이 어지럽든가 더럽든가 신경쓸 겨를이 없다. 순간 ‘이 집은 왜 이렇게 지저분해?’하고 생각했었다 해도 그 집 문 밖을 나가는 순간 그 기억은 머리 속에서 삭제된다. 이렇 듯 상대는 막상 기억도 하지 못할 것을 가지고 나 혼자 ‘연연’하고 때로는 ‘집착’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분명 상대의 눈을 ‘의식’해서 한 행동이지만 사실 그 상황이 찝찝하고 신경쓰이고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나’일 뿐이다.
우리는 나름 소중하고 깊은 관계 속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엄청 신경쓰고 있을 것 같은데' '불편해할 것 같은데' 하며 무진장 애를 쓰다가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 얘기해보면 진작 상대는 말 그대도 ‘1도’신경 쓰지 않아 허무하게 느꼈던 경험들을 하곤 한다. 그 역시 나와는 다른 존재이므로 나와 생각하고 느끼는게 똑 같지도 않으며 그 일이 오로지 나에게한 ‘속한’일이라면 더 더욱이 그렇다.
나는 ‘보이는 걸’위해 그토록 노력하고 있는데 진짜 보이고 싶은 상대는 그 반의 반의 반도 관심히 없다는 걸 안다면 당신을 하고 있는 노력을 꾸준히 하게 될까? 아마 바로 당장은 아니여도 조금씩 조금씩 ‘의식’하는 부분은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을까.
나보다 더 나은 그 모든 것들에 잠시 부럽고 배가 아플지는 모르겠지만 그 뿐이다. 그것은 결국 그 사람의 삶이지 나의 삶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을 ‘다른 사람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계속 남과 비교하고 또 ‘보여주는’ 것에 대해 의식하며 살아라.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그래 이 사람은 이 사람의 삶이 있고 나는 나의 삶이 있는 거야.”라고 넘겨버려라. 부럽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니 그 감정자체를 부정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오롯이 인정하는 것이 나의 삶을 더 발전시키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기도 하니 말이다.
혹자는 보이는 것이 아닌 ‘내면이 명품’인 사람에 대해 얘기하고는 한다. 물론 겉에 보이는 것들도 예쁘고 화려하다면 더 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아니 혹은 할 수 있다고 해도 굳이 선택하자면 나는 ‘내면이 명품’인 사람이 되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은 보이는 것들에 대해 잠시 부러워할 뿐 진작 그 사람의 속은 텅텅비어있었을 때 그 곁에 머물고 하고싶어하는 이는 별 없을 것이다.(콩고물이라도 떨어지려나 하고 옆에 있는 사람은 있을지도 모르겠다.)하지만 보이는 것은 평범하고 어떨땐 누추하지만 뭔가 빛이 나는 사람이라면 내면이 꽉 차있고 단단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 옆에 머물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많을 것이다.분명 이 점을 인정하고 있으면서 보이는것에 대해 과하게 의식할 필요가 있을까
‘속이 빈 것들이 꼭 저렇게 명품으로 쳐(?)둘러서 감추려고 한다’라는 비난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사실 그것도 부러움이다. 적절한 ‘비판’이 아닌 감정에 앞선 이유 없는 무작위한 ‘비난’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우리도 가진 것이 있다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다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는 ‘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 뿐이다. 부러우면 그런 재력을 가질 생각을 하고 ‘못 올려다 볼 나무면 쳐다 보지도 말라’고 했다.
(간혹 남의 눈을 진짜 ‘하나도’의식하지 않고 진상 개망나니 같이 지 맘대로 사는 인간들이 있는데 나는 그렇게 하라는 말은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말자. 내가 말하는 ‘의식’은 ‘남에게 보여지는 것’ ‘남과 비교하는 것’에 대한 의식이지 기본적인 예절이나 예의같은걸 말하는게 아니니깐,)
잊지 말길 바란다. 생각보다 ‘남’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그러니 ‘보여지는 것’들 보다 ‘보여지지 않는 내면’을 더 갈고 닦고 ‘남의 눈에 맞기위해 사는 인생’이 아닌 ‘나를 위한’삶을 살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