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열치열이 싫어요
내가 중학생이 될 무렵에야 우리 집에도 에어컨이 생겼었다. 그전에는 선풍기가 여름을 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래도 잘 버텨내며 살았던 것에 비해 요즘의 한국 여름이 너무나 버티기 힘든 것을 보면 지구온난화가 진짜 현실인가 싶기도 하다. 한국의 더위가 무서운 이유는 아마도 습도 때문일 것이다. 그에 비해 건조한 프랑스는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만 해도 조금은 서늘해진다. 그래서인지 에어컨이 많이 보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난 여름이 다가오는 게 조금 겁이 났다. 이곳의 여름은 한국처럼 덥지 않다고 했는데,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 맞이했던 여름에는 그전년도 보다 덥다고 그러더니, 올해는 작년보다 더 덥다. 지구가 이상해지고 있는 것 같다. 언뜻 듣기로 올해 이탈리아는 폭염이 심각해서 에어컨이 평년보다 많이 팔렸다고 했다. 변하는 유럽의 여름 날씨로 이제 유럽 전역에도 이전보다 더 에어컨이 보급되고 있다. 조금 더 나중에 유럽에 올 걸 그랬나 보다.
여름은 점점 더 더워지는데 프랑스에는 딱히 여름 요리라고 할 만한 게 없는 모양이다. 기껏해야 길거리에 아이스크림 가게에 사람들이 전보다 더 많이 줄 서있는 게 보이는 정도이다. 여름이면 에어컨을 켜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냉면, 콩국수를 먹는 한국에 비해 더운 여름 나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 여름이 다가오며 점점 더위가 느껴질 때쯤 나는 냉동실에 얼음을 얼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난 한국에 있을 때 한 겨울에도 냉면을 먹을 만큼 냉면을 좋아했다. 그런 내가 여름에 냉면을 얼마나 잘 먹었겠는가. 프랑스에는 가장 큰 파리에서조차 냉면 파는 식당이 없다. 냉면을 대신해서라도 차가운 면이 먹고 싶었고 마트를 둘러보다 검은콩을 발견하고는 한 봉지 사들고 왔다. 콩을 불리고 삶아낸 후, 갈고 체에 걸러 검은콩 국물을 만들었다. 면을 삶아 콩 국물을 붓는다. 더 차갑게 얼음을 동동 띄워준다. 검은 콩국수다. 매일 따듯한 음식들만 먹다가 시원한 음식을 먹으니 살 것 같다. 역시 난 이열치열이 싫다. 더우면 그냥 냅다 차가운 것을 먹는 게 좋다.
파리에 볼 일이 있어서 갔다가 파리의 K-마트에서 냉동 냉면 육수를 사 올 수 있었다. 냉동실에 얼려두고는 소중하게 아껴먹었지만 더워서 차가운 냉면을 계속 찼다 보니 금세 동이 났다. 우리 동네 아시아마켓에는 냉면 육수는 팔지 않아서 이제 파리에 볼 일이 있어 가기 전까지 냉면을 못 먹나 싶었는데 유튜브에서 한 남자 배우가 조미료로 냉면육수를 만드는 영상을 보았다. 이거다 싶었다. 그 배우의 레시피를 따라 냉면 육수를 끓였다. 밤새 실온에서 조미료 육수를 식히고는 다음날 맛을 보았다. 시판 냉면 육수 맛이다. 언뜻 듣기로는 한국 식당들에서 많은 곳들이 조미료로 냉면 맛을 낸다고 했으니, 사 먹는 맛과 이 육수가 비슷한 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냉면 육수를 만들어 냉동실에 쟁여두었다.
냉면 육수가 있다고 물냉면만 먹겠는가. 나는 비빔물냉면을 좋아한다. 물냉면에 비빔양념장까지 넣는 것이다. 거기에 겨자에 식초까지 넣어 아주 자극적으로 먹는다. 비빔장도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고 싶을 때마다 먹는다. 냉면을 먹으니 고기와 냉면을 함께 먹고 싶어 불고기를 만들어 곁들기도 하고 돼지고기를 양념해서 함께 먹기도 한다. 내가 냉면을 SNS에 업로드하자 한국인 유학생 동생이 냉면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 친구를 초대해서 불고기와 냉면을 맛 보였다. 지난번에는 짜장면을 양념까지 모두 먹고 가더니 이번엔 냉면도 남김없이 해치우고 돌아갔다. 혼자 먹어도 맛있지만 역시 함께 먹는 게 더 좋다.
냉면 육수가 있으니 할 수 있는 게 제법 있었다. 냉면 육수에 냉면면이 아닌 소면, 메밀면 등을 이용해서 다양한 냉국수들을 해먹었다. 소면을 삶아서 김치를 얹고 참기름을 살짝 뿌려준다. 냉면육수를 부은 후, 오이 고명과 깨를 좀 뿌려주니 김치말이국수가 금세 완성이다. 너무 맛있어서 이틀 연속으로 김치말이 국수를 먹었다. 냉면면이 아닌 매밀면을 삶아서 오이와 김가루를 고명으로 곁들여 냉면육수와 함께하니 물막국수다. 또한 육수에 마른미역을 물에 불려 적당한 크기로 잘라주고 채 썬 오이까지 곁들이니 오이미역냉국이 되었다. 조미료 육수는 만능이었다. 한 솥 끓여 소분해서 냉동실에 얼려뒀던 냉면 육수가 바닥나서 얼마 전 다시 육수를 끓여 냉동실에 넣어뒀다. 이번 여름은 먹는 것을 사랑하는 배우의 조미료 냉면 육수 덕분에 시원하게 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