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함께 하던 밴드 "암과 흑"은 각자 바빠지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아쉬움을 가진채 우리는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시 함께 하자는 말을 하면서 해체가 아닌 활동중단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그렇게 또 한동안 합주를 하지 않은 채로 시간을 보냈다. 레슨은 계속했다. 레슨은 하지만 연습은 언제나처럼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았다. 실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지루한 주말 하루, 베이스를 보다가 다시 합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원 연구실 생활을 하던 시절이라 개인 일과가 가능한 시간이 토요일 5시 이후부터 일요일 뿐이었다. 밴드 커뮤니티에서 베이시스트 구인글들을 찾아보는데, 베이스를 찾는 밴드는 많았지만 나와 시간이 맞는 밴드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러다 한 곳을 찾았다. 송파구 잠실 근처의 자체 합주실이 있는 연합밴드라고 했다. 연합밴드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 시간이 맞으니, 연락을 하고 찾아갔다. 가는 길이 조금 멀었다. 지금까지 다 홍대 근처로 가까운 곳이었는데, 처음으로 합주를 위해 먼 걸음을 해야 했다.
찾아간 곳은 합주실을 빌려두고, 여러 밴드들이 함께 쓰는 "연합" 밴드 모임이었다. 그중 한 밴드가 베이시스스트가 그만두며 자리가 났던 거였다. 밴드는 여자보컬, 남자보컬, 기타 2명, 키보드, 드럼까지 완전히 풀로 갖춰진 밴드였다.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함께하는 밴드는 처음이었다. 오디션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밴드에 합류하게 되었다. 남자 보컬용 곡과 여자보컬 용 곡으로 총 두곡을 연습해야 했다. 일요일 오후에 밴드 합주를 했고, 합주가 끝나면 언제나 회식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 색깔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좋았다. 화기애애했다. 그렇게 한 두 달 즐겁게 주말에 합주를 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난 사람이 많을수록 조용해지는 타입이라, 주로 이곳에서는 조용히 술을 마시며 크게 내 의견을 내세우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보컬이 폭풍발언을 했다. 회사에서 독일로 1년여간 파견을 나가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한 달 뒤쯤까지만 밴드를 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자기도 이제 곧 바빠져서 더하기 힘들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면서 밴드에 많은 이탈자가 생길 조짐이 보였고, 약간 리더 격이었던 남보컬이 말했다. 우리 공연을 하면 어떻냐는 거다. 마지막으로 공연을 하고 해체하자는 거였다. 그렇게 한 달 뒤로 공연이 갑자기 잡혔다. 연합밴드이기 때문에, 합주실을 함께 쓰는 다른 팀들을 모집해서 연합공연을 하게 되었다. 저렴한 공연장을 빌린다고 했다. 공연은 처음이었고, 나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공연을 하게 되면서 곡도 더 늘려야 했다. 어렵게 곡을 정하고는 급하게 연습에 들어갔다. 곡도 좀 어려워서 나는 꽤나 힘들게 연습을 했다. 공연을 하게 되면서 나의 밴드 친구들인 "암과 흑" 친구들에게 내 공연을 알리고 놀러 오라고 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공연 당일이 됐다. 공연장으로 조금 일찍 갔다. 암과 흑 친구들 중 몇 명은 지방에서부터 내 공연을 위해 올라와주었다. 먼저 악기 세팅을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소리가 전혀 안 들렸다. 어떻게 연주하란 건지 감이 안 잡혔다. 다른 팀이 먼저 공연하는데, 나는 긴장되니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우리 팀 공연차례가 되자, 내 친구들이 무대 앞으로 모두 와서는 카메라로 나를 열심히 찍어주며 열렬한 응원을 해줬다. 가장 열렬한 팬들이어서 사람들이 즐거워했다. 공연이 시작하고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내 악기 소리가 전혀 안 들려서 내가 어떻게 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엉망진창 공연을 마치고는 모두 함께 뒤풀이 자리로 갔다. 내 친구들은 다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생각하니, 밴드 마지막 날이라고 그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멀리서 와 준 친구들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던 것 같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챙겨줘야 하는 건데 말이다. 그렇게 뒤풀이에서 술도 마시고, 다른 밴드 사람들과도 대화를 나눴다. 다른 밴드의 드러머분이 나보고 나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 밴드에서 워낙 더 크게 실수를 많이 한 사람이 있어서 나는 무난했다고 했다. 칭찬은 아니었던 거다.
우리 밴드 리더인 남보컬이 옆자리로 왔다.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자기는 이 밴드 해체하면 새로운 밴드를 할 거라 했다. 여자친구가 드러머라서 여자친구가 드럼 치고, 자기가 보컬 하면서 베이스와 기타만 더 구할 거라 했다. 나보고 함께하겠냐고 했다. 이 남보컬은 아마추어지만 보컬이 제법 탄탄하고 밴드 경험도 많았다. 연합 합주실의 합주실도 이 사람이 구한 것이라 합주에 열정이 꽤나 큰 사람이었다. 나로도 괜찮을지 걱정되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물었다. 나는 밴드와 합주는 어디까지나 취미생활이라고, 그리고 정말 내 실력으로도 괜찮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남보컬은 내 베이스 소리가 좋다고 했다. 기분이 좋았다. 내 베이스 소리가 좋다고 하다니. 그렇게 밴드가 해체되는 마지막 날, 난 새로운 밴드에 스카우트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