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 (Gas-lighting)
뛰어난 설득을 통해 타인 마음에 스스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
친구에게 글 제목이 파김치 가스라이팅이라 하니 친구가 파김치 하고 가스라이팅이 어떻게 같이 붙을 수 있냐고 했다. 이건 단순한 얘기이다. 나는 파김치에 대해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다. 가스라이팅의 뜻이 뛰어난 설득으로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 의심을 불러일으켜 상대방이 판단력을 잃게 만드는 거다. 파김치에 대해 내가 그렇다는 얘기다.
파김치는 원래 마이너 한 김치였다. 주인공 격인 메인 김치로 배추와 무김치가 있다. 무김치에는 섞박지, 깍두기 정도가 있다. 파김치는 그다음의 김치였다. 그러나 어느 날 어디가 시작인지 모르겠지만 "짜장라면엔 짜파게티가 국룰"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유튜브 먹방 세계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은데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따라서 짜장라면에 파김치를 먹기 시작하면서 파김치의 위상이 그 이전에 비해 많이 향상되었다.
앞선 글에서 내가 생마늘을 잘 못 먹는다 말했다. 생양파나 파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어릴 적부터 나는 파김치의 하얀 머리 부분을 먹는 게 힘겨웠다. 나는 파김치를 잘게 잘라 줄기 부분만 한 가닥 먹는 정도였다. 그렇기에 파김치에 대한 내 인식은 썩 좋지 못했다. 그러다 파김치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너도 나도 짜장라면엔 파김치가 최고라고 했다. 여기에 차돌박이 같은 고기까지 곁들여 먹으면 더욱 환상 조합이라 말했다. 많은 먹방 유튜버들은 자신들의 채널에 짜장라면과 파김치 먹방을 올렸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에서도 파김치가 자주 나오기 시작했다. 작년 즘이었던가, 한 여자 예능인이 꽃게 액젓을 가지고 만든 파김치를 같은 프로 출연자가 홀린듯이 먹어치우는 모습에 사람들이 꽃게 액젓을 사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꽃게 액젓이란 존재조차 몰랐었다. 그 당시 해외에서 지내던 시절이었는데, 그 방송을 보고 궁금했던 한국인 지인이 한국에 다녀오며 꽃게 액젓을 사 와서 함께 파김치를 담갔다. 꽃게 액젓은 그냥 액젓에 비해 그 감칠맛이 더 강했다. 꽃게 특유의 달짝지근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내게는 여전히 파김치일 뿐이었지만.
한국에 돌아오니 짜장라면이나 각종 한국 라면들을 너무나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어느 날 짜장라면이 먹고 싶었다. 그런데, "짜장라면엔 파김치지!"라고 머릿속에서 누군가 외치는 것 같았다. 쪽파를 주문해서는 파김치를 담갔다. 익기를 기다렸다. 파김치를 기다리며 짜장라면에 대한 욕구를 꽤나 오래 참아냈다. 드디어 파김치가 준비되었다. 사람들이 추천하는 소고기까지 구워 만반의 준비를 했다. 파김치와 짜장라면을 함께 먹는다. 언제나처럼 갸우뚱한다. 난 정말 모르겠다. 이게 진정 잘 어울리는 베스트 조합인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구운 소고기와 함께 짜장라면을 먹는다. 또 한 번 갸우뚱한다. 어울리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서는 '이게 베스트 조합이라고? 아닌 거 같은데'하면서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짜장라면엔 파김치야!"라고 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내 생각이 틀린 건가 싶다. 난 파김치 가스라이팅을 당했다. 난 파김치에 대해서 이제는 모르겠다. 뭐가 맞는 건지 혼란스럽다. 정말 모두가 짜장라면에 파김치를 곁들여 먹는 걸 좋아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