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나 불안이 자주 찾아오곤 하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나에게도 역시 좋은 날이 있다. 프랑스에 있던 시절에 가장 좋았던 때라면, 약이 맞지 않았던 것인지 약 덕분에 기운이 너무 나서 의사가 조증이 온 것 같다며 약을 바꾸기로 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었던 것 같다. 언제나 생각이 많은 편이긴 했지만, 그때 머릿속에서의 각종 아이디어나 여러 생각들이 모두 긍정의 빛을 지니고 있었다. 모두 다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연하게 로또가 될 것 같아! 그런 헛된 희망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계획하고 하는 나의 일들이 다 내 뜻대로 이뤄질 것 같았단 말이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도 자신감이 있었고, 삶도 긍정으로 가득한 그런 시기였다. 하지만 약이 사라지며 그 시기는 다시 지나갔고 나는 원래의 나로 돌아왔던 것 같다.
프랑스에서의 시절 동안 좋은 일들도 많았고, 좋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기에 일상은 다채로움으로 제법 가득 채워있었지만 연구실에서의 생활은 그렇지 못했다. 연구원이란 자신의 정체성에 의구심만 들었고, 연구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 일상에서 아무리 좋은 일이 일어난들,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직업적 일에서 어떠한 성취도 얻지 못하니 삶에 대한 불만과 앞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가득 차있기도 했다. 그런 맘을 외면하려 애쓰며 일상에서 다양한 활동을 채워나갔기에, 주변의 사람들은 나의 어려움을 잘 알지 못했을 거다. 누군가가 내게 "프랑스 생활은 어때?"라고 물었을 때, "연구 빼고는 다 잘돼요"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내 마음속 웃음은 없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얼른 실적을 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일요일에 한국에 도착한 후, 바로 월요일 새 일터로 출근을 했기에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처음 보스를 만났을 때 내게 이곳에서 하던 것을 하는 게 아니라, (나는 그런 런줄 알고 이곳에 왔는데) 내가 해온 것들을 바탕으로 이곳에 새로움을 가져오길 기대한다고 하더라. 주어진 주제가 아니라 연구에 자유를 얻으니 아이디어들이 샘솟았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보스는 내 생각들을 모두 맘에 들어했다. 그렇게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하지만 다섯 달 가까이가 지났지만 큰 진전이 보이지 않았고 나는 조급해지기 시작했었다.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하기 직전이었던 것 같다. 연구원으로, 유기화학을 하는 사람으로 나는 능력이 없는 것 같아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을까, 세상에 내 자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나를 두렵게 했다. 그러다 좋은 날이 찾아왔다.
비싸게 주문한 시약이 쓸모가 없게 되었다. 잘못 주문한 셈이 되어버렸는데, 다시 활불 할 수도 없으니 이걸 어찌 쓸 곳이 없을까 하는 안 해도 되는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그 분자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전에 누군가의 발표에서 들었던 내용과 함께 내가 예전에 합성했던 분자가 떠올랐다. 그 두 가지를 접목시켜 새로운 분자를 디자인했다. 내 생각이 맞다면,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을 들여 새로운 분자를 만들었다. 금요일 아침 분자를 시험 삼아 테스트해 보았다. 결과는 내가 맞았다. 내 생각이 맞았다. 실제로 내가 생각한 그대로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오후에 미팅이 있어서 오래간만에 보스를 만났는데, 이런 분자를 만들었고 이런 모습을 보인다고 말을 건네자 보스도 관심을 보였다. 쭉 진행해 보라 했다. 그 후에는 이와 관련된 아이디어들이 끊임없이 떠올랐고, 주말 낸내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 실험에 대한 자료 조사와 계획들을 세웠다. 언니네 집에 갔었는데, 아침에 일어난 형부가 새벽에 나를 보고는 "안 잤어?"라며 놀래기도 했다. 모두가 자러 갈 때도 나는 노트북 앞이었고,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다시 노트북 앞에서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일주일이 더 지났다. 세상이 내게 그동안 안되던 연구에 고생했지-라며 보상을 해주듯, 모든 결과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나왔다. 이걸 하면 이 이 결과가 나오고, 저걸 하면 저 결과가 나왔다. 하도 많은 아이디어를 쏟아내어 진행을 하면서 보스가 혼자로는 벅찰 거라 여겨졌는지 먼저 다른 사람들을 붙여주겠다고 제안을 했고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지금의 연구에 세 명이 더 함께하게 되었다. 가장 고학기의 학생들 두 명이 내 연구에 관심이 보여, 모두 함께하기로 했고 새로 합성할 분자들이 많아 아래 학생을 하나 더 추가하게 되었다.
요즘 나는 연구가 즐겁다. 연구가 즐거워지며 일상의 많은 시간이 즐거움으로 가득차다보니, 최근 기억나는 그 어느때보다 좋은 것 같다. 대략 5년 전쯤에도 연구가 즐거웠던 시절이 있다. 누구나 잘 되면 즐겁지만, 나는 그 옛날 즐거웠던 기억이 있기에 박사 후연구원을 가기로 했었지만 막상 떠난 그곳에는 즐거움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두지 않았고, 계속 내 나름의 길을 가다 보니 즐거움이 다시 찾아왔다. 어려움은 언제든 있을 거다. 하지만 좋은 날도 오는 거다. 그렇기에 삶은 계속될 수 있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