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한 참 좋다고 느끼던 때였다. 우울감은 (우울증이라기보다는 우울감이라 하겠다.) 어느 순간 들이닥친다. 이유가 뭐냐고 물어본다면, 뭔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순간에는 그게 무엇인지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그저 어느 순간 갑자기 침울함과 함께 쳐지기 시작한다.
어제가 그랬다. 나는 아침까지는 기분이 꽤나 좋은 상태로 일주일이 넘게 나라는 사람 치고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조금은 좋아지려 하던 차였다. 출근 시간보다 훌쩍 이른 시간에 연구실에 나갔고, 궁금했던 실험을 했다. 측정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며, 기대하던 결과도 얻었다. 시작이 좋았다. 이 기세로 쭉 해나가면 오늘 하루도 제법 성취감 있는 하루가 되겠구나 하는 마음에 조금 들떴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하려던 것들은 할 수 없는 상황들이 계속 일어났다. 내가 열심히 하려 한다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냥 실험실에서 나와 오피스 자리에 앉아야 했다. 갑자기 울적함이 찾아왔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나도 아깝고,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소용 인가 하는 불필요한 생각들이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최근에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호흡을 해본다.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뱉는다.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가득하지만, 머리를 비워보려 숨을 쉬는데 보다 더 집중해 본다. 이게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여전히 침울함은 느껴졌지만, 조금이나마 다시 일어나서 뭐라도 하자는 생각이 들었으니 아마도 도움이 된 걸 거다.
실험 노트를 꺼낸다. 내일 하려고 했던 실험 반응들을 적고 조건들을 적어나간다. 일어나서 실험실로 돌아간다. 모든 게 귀찮다는 기분도조금씩 들지만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손을 움직인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손과 몸을 움직이면 한결 나아진다. 워낙 많이 하던 일이라 크게 생각할 것도 없이 할 수 있는 실험들이라 이런 때 제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반응을 모두 걸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낫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있을지라도, 그동안 내가 걸어 둔 반응들은 돌아갈 것이다. 나의 침울함으로 무기력하게 흘려보내는 시간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닌 거다.
갑작스러운 우울감은 찾아온다. 조금만 다시 힘을 내야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시간을 흘려보내지. 그러면 이렇게 다음 날 아침 조금 더 나아진 기분으로 오늘 하루를 다시 기대하게 되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