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획을 좋아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을 마시고는 책상에 앉아 잠시 그날 할 일들을 정리한다. 그 후에 움직인다. 하루의 일과, 일주일 식단, 주말 계획, 등 나는 무엇이든 계획을 세우는 편이다. 계획이란 다음을 예상할 수 있게 해서 내게 안정감을 준다. 물론 모든 이들이 나와 같지 않다는 것도 안다. 예를 들어, 나와 가장 가까운 우리 언니를 보자. 내가 일을 위해 프랑스에 머물던 시기에 조카들과 형부, 그리고 언니까지 언니네 가족이 프랑스로 여름휴가를 왔다. 유럽으로 온 가족이 오는 것이니 돈도 제법 썼을 거다. 그런 그들이 다른 많고 많은 나라들 중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를 선택했다. 내가 있는 스트라스부르에 찾아와서 며칠을 지내고는 파리로 갔다. 파리로 갈 때 나도 휴가를 내고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짧은 여행으로 온 사촌 동생까지 합류하여 어른 넷, 아이 셋으로 우린 제법 대가족다운 모양새로 모여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어른들 중, 계획 세우는 이가 나뿐이었다. 모두가 파리에 모이게 된 날, "오늘 계획이 뭐야?라고 언니에게 물었다. "응? 우린 딱히 계획 세운 거 없는데?" 그런 언니의 대답에 당황스러웠다. 내가 프랑스에 있기에 프랑스를 휴가지로 선택해서 온 그들이었다. 그들을 즐겁게 해야 한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검색을 하며 일정을 짰다. 단체메신저에 일정을 올렸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내가 짠 계획을 즐겨주었다. 그들과 함께하는 일주일 간 나는 매일 저녁 자기 전, 단체방에 다음날 일정을 공지했다. 나는 거의 그들의 가이드였다. 그때 크게 느꼈다. 모든 이들이 계획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계획과 목표 설정을 좋아하는 나는, 연말이 되기 전 하는 일은 새로운 노트를 사는 것이다. 지난 12월에도 여느 해처럼 새로운 노트를 샀다. 언젠가부터 매번 같은 브랜드의 노트로 색만 매년 다르게 고르고 있다. 비싸지도 않고 별다른 특징이 없는데, 그런 특징 없지만 크게 불편하지도 않은 그 무난함이 좋다. 새해가 오기 전 보통 미리 노트를 새로 세팅한다. 세팅은 매년 바뀐다. 여전히 나에게 최적화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변화를 주는 중이다. 보통은 먼저 새해 다짐 같은, 그러니 이번엔 2025년의 목표들을 쫙 나열해서 적어본다. 그런 후, 1월부터 12월까지 한눈에 볼 수 있게 페이지 나란히 만들어 둔다. 나는 연간/월간/주간/일간 계획을 모두 작성한다. 연간 계획표에는 주요한 것만 적어두고, 분기별로 큰 목표를 정해둔다. 그런 후, 매달 초에 월간 계획에 필요한 내용을 옮겨 적고 그것을 바탕으로 매주 주간 계획, 그리고 매일 아침 일간 계획을 정리한다. 이번에도 언제나처럼 새해를 맞이하며 스케줄 노트를 정리했다. 새해 다짐으로 2025년에 하고 싶은 일들과 발전한 나를 위해 여러 목표들을 적어나갔다. 적고 적었더니 할 일들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더라. 내가 욕심이 너무 많은 건가 싶기도 해서 조금은 줄일까 싶었지만, 모두 하고 싶었고 모두 해야 할 일 같았다. 그렇게 계획이 가득 적힌 노트와 함께 새해, 2025년을 맞이했다.
2025년이 되기 전 날, 예약해 둔 레스토랑이 꽤나 만족스러워서 기분 좋게 2024년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1월 1일이 되고 1월 내내 기껏 세워둔 계획들은 거의 지키지 못하고 나태한 일상들을 보냈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그 한심함은 더욱더 나를 우울감과 좌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악순환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기껏 준비한 스케줄 노트가 텅 비어있는 게 싫어서, 기존에 작성한 것들을 모두 무시하고는 새로 계획을 세운 그날 이후로 마음이 한결 나아졌던 것 같다. 스스로의 일상이 한심하여, 유튜브로 갓생을 살아가며 일정관리를 잘 해내는 사람들의 영상을 찾아보며 생산성을 높이려 했는데, 그렇게 보던 영상 중에서 한 유튜버가 연간 계획을 세우면 못 지키기 딱이라고 했다. 일단 "년"단위 자체가 너무 긴 것이 문제라고 했다. 그렇기에 자신은 12주 계획을 세운다고 했다. 12주, 즉 3개월이다. 무언가를 습관화하고 이뤄내기에 적당한 시간이라고 했다. 3개월이 아닌 12주라 하는 것은 매주 다시 평가하며 마음을 새롭게 다잡기 때문에 월이 아닌 주로 생각한다고 했다. 그게 와닿았다. 그럴듯했다.
노트를 꺼내 다시 세팅을 한다. 올 해의 목표는 업무적인 것과 일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만 몇 개 적어둔다. 그런 후, 일 년을 12주씩 나눠 일종의 분기별 계획을 세우게 됐다. 그 다음은 이번 12주 동안의 일정들을 정리한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을 구분한다. 즐거워서 하는 것, 배우고 싶어서 하는 것, 다양하게 채워 넣는다. 자주 빼먹는 약 먹기라던가, 충분한 수분 섭취라던가, 자기 전 책 읽기와 같이 습관화하고 싶은 루틴들을 Habit tracker로 만들어서 꾸준히 확인할 수 있게 준비한다. 건강관리를 해야 하기에 몸무게나 운동 기록도 모니터링이 수월하도록 표를 만들어둔다. 해야 할 것들을 수첩에 모두 정리를 마치고 수첩을 덮으니, 엉망으로 지낸 1월과 다르게 2월에는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새로운 계획표를 따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가 세운 계획들을 해치우며 하루하루를 지낸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 계획을 세운다. 계획표 옆에는 실제로 내가 행동한 것들을 기록할 수 있게 정리한다. (밤에 하루를 돌아보며 계획과 실천을 비교하며 하루를 정리한다.) 아침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문구들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는 아침에 떠오른 자유로운 생각들을 글로 남긴다. 그런 후, 책을 읽고, 가벼운 운동을 한다. 건강관리를 하면서 도시락을 싸기에 출근 전 도시락 싼다. 출근 준비를 하고 연구실에 도착한다. 연구실에 도착하면 실험실에 바로 가기보다는 오피스에 자리 잡고 메일을 확인하고, 직장에서 해야 할 일들을 우선순위로 포스트잇에 적어 앞에 붙여둔다. 직장에서 조금 더 성과를 내고 싶지만, 실험은 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다시 집중력이 좋아지면서 괜찮은 아이디어도 생각나서 이대로 쭉 한다면 좋은 결과를 낼 것을 기대하고 있다. 노력한다고 모든 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으로 이뤄질 것 같이 보이는 것들도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연구가 그렇다. 조금은 결과가 예측이 된다. 그러니 내가 해나가기만 하면 된다.
퇴근 후에는 일은 손에서 놓는다. 일과 일상을 깔끔하게 분리한다. 몇 달 전 '조증인가?'라고 생각이 들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출근 전부터 출근 후까지 연구에 대한 생각과 실험만 했다. 지금 내 위치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을 것 같기도 하지만- 필요한 시간에만 집중하는 것이 효율은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요즘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연구만을 위해서 살아갈 때, 뜻대로 연구가 흘러가지 않으면 삶이 모두 흔들리는 기분이다. 그러니 일과 일상은 분리해야 내가 건강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저녁에는 취미 시간들로 나를 채운다. 주 2회 복싱을 배우고, 주 1회 베이스를 배운다. 온라인으로 펜드로잉 강좌도 듣는다. 한 달에 한 번은 어린이를 위한 쿠킹클래스를 열고, 한 달에 한 번 4시간 사람들과 영어회화를 하고 온다. 자기 전에는 책을 꾸준히 읽으며 숙면에 도움 되도록 뇌에 자극을 최대한 덜 주려고 애써본다.
나는 목표를 세우고 그걸 수행해 나가면서 느끼는 성취감을 좋아한다. 이런저런 하고 있는 것들이 많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번 달에 도전과제로 재미삼아 하는 것이 매일 그림 그리기이다. 수채화와 다르게 불투명한 과슈를 새로 사서 써봤는데 영 어색하기만 하기에, 과슈에 익숙해질 겸 과슈를 이용해 매일 밤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다. 꾸준히 그린 지 이제 겨우 일주일이지만, 일주일 동안 매일 그리며 처음보다는 감을 잡아가고 있다. 한 달 뒤와 첫날의 그림을 비교해 볼 생각을 하면 이미 즐겁다.
거창한 계획은 없다. 그나마 가장 거창한 계획이라면, 올해 연구 논문을 3편 쓰고, 리뷰논문을 1편 쓰겠다는 거다. 한 편은 거의 정리 중이고, 다른 두 편은 실험 데이터가 쌓여가고 있으니- 3편은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무리할 것은 없는 셈이다. 그 외에 또 다른 묵직한 계획이라면 다이어트인데, 도시락으로 식이조절을 하고 (주말에는 좋은 식당을 예약해서 먹는 거에 불만은 없다.) 운동을 해나간다. 그러니 이대로만 하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까? 그러니 거의 모두 소소한 계획들이다. 거창한 것들도 이룰법한 것들인데, 소소한 것은 더 수월하다. 계획을 세웠고, 지켜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과정이 난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