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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라서”가 사랑의 이유여야 할까?

by 이확위

지난 글에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라는 말이 내가 꿈꾸는 사랑의 고백이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스스로가 부족하게만 느껴지는데,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길 바라는 게 조금은 모순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이상적 고백이 모순이 가득하다는 걸 깨닫고는, “너라서”가 사랑의 이유가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있는 그대로의 너” 혹은 “너라서”라는 사랑의 이유를 좋아하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서 오는 불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내가 상대가 나를 사랑할 리 없다는 마음에 사랑에 의심이 들어, 그저 나인 것만으로 충분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착각하고 싶은 마음에서 말이다. 사랑에 이유가 필요하고, 누구나 이상이 있을 테니, 내가 그것에 미치지 못할 것이 두려워- 그저 나라는 존재 자체가 상대에게 완전한 사랑의 대상이기를 바라는 거다. 그러니 나조차 “너라서”가 사랑이었던 적이 있나 싶다. 그 정도의 대단한 사랑을 한 적이 있나? 생각해 보면, 사랑의 이유가 뭐였는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너니까”, “너라서”, “있는 그대로의 너”라고 누군가에게 온전히 만족한 그런 감정은 없었다. 그 정도가 가능할 수 있는 건 거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닌가 싶다. 그 정도의 사랑은 부모가 자식에게 느끼는 사랑정도여야 가능하지 않을까? 혹은, 어쩌다 존재하는 정말 운명 같은 사랑이거나 말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살아보며 알겠지만, 내가 특별한 경우는 많지 않다. 아니 난 특별하지 않다. 난 그냥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 중의 하나이다. 세상에서 내가 조금 더 의미 있는 존재이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그게 딱히 중요하지도 않다. 특별하지 않은 나이기에 내가 대단한 사랑을 할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특별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듯, 대단히 특별하지 않은 사랑이어도, 그냥 보통의 사랑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딱히 특별하지 않은 사랑을 했었고, 어떻게 끝이 났든- 나름의 의미로 내 삶을 차지했고, 나를 변화시켰다. 인생에 하나의 사랑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 사랑이 꼭 연인의 사랑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부모로부터의 사랑일수록, 가족을 향한 사랑일 수도, 친구에 대한 우정의 사랑일 수도, 세상에는 여러 사랑이 있고. 그저 나라는 존재인 것만이 사랑의 이유일 필요는 없다. 삶에는 사랑이 필요하다고는 믿지만,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고 사랑의 대상도 다양하니 사랑의 이유도 다양할 수 있다고 본다. 이상과 현실이 다르듯, “너라서”가 사랑의 이유인 건 그저 이상에 가까운 말인 것 같다. 나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생각해 보면 조금은 무서울 것도 같으니까. 그러니 나의 이상적 고백에 대한 기대감 따위는, 어린 시절 동화 속의 백마 탄 왕자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딱히 백마 탄 왕자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런 고백을 기대하는 것도 우습다. 사랑에 대한 글을 써 내려가며 점점 깨닫는 것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면,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는 데 이유를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 “너라서”라는 말 따위가 딱히 불안감을 없애주지도, 믿음을 주지도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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