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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여행 계획을 세우는 계획형 인간

by 이확위

나는 계획형 인간이다. 계획을 좋아한다. 언제나 그래왔다. 어릴 적부터도 무언가를 하려면 계획을 세웠다. 방학이 시작할 때면 방학 계획을 세웠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공부 계획을 세웠다. 새해가 되기 전에는 새해 다짐을 적을 노트를 새로 마련하고는 1월 1일 새 노트에 새해 목표들로 한 해 계획을 세운다. 그러니 여행을 갈 일이 있으면, 일찌감치 모든 계획을 세웠었다. 갈 곳들에 대해 미리 알아보고, 정리하여 파일을 만들었다. 그렇게 계획을 잔뜩 세워두고 떠난 여행들은 오히려, 계획을 세우며 너무 많이 알아봐서인지 오히려 감흥이 없어 실망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빼곡한 계획은 하나가 틀어지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것은 스스로의 문제점을 파악해서 적당히 타협하게 된다는 거다. 나만의 방식을 찾아가는 거다. 계획형 인간의 본성은 그대로 가지고 있기에 계획이 없으면 불안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계획을 조금은 러프하게 짜기 시작한다. 미리 너무 알아보지 않는다. 어차피 엄청난 장기 여행 일정은 없기에 대단히 미리 준비할 여행은 없다.


오늘부터 시작된 9일간의 학회 겸 여행 준비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이틀 전에 짐 챙겨할 것들 리스트를 다시 체크한다. 하루 전날 준비하다가는 필요한 것을 구하지 못할 수 있기에 이틀 전에 한다. 하루 전날 짐을 싼다. 체크리스트로 만들어두어, 캐리어에 넣거나 가방에 넣은 것들을 모두 체크한다. 빼먹고 가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것은 한 곳에 위치시킨다. 계획형 인간에 늦으면 불안감이 커지기에 공항에는 3시간 전에 도착한다. 그러니 출국심사를 마치고 나면, 시간이 아주 여유롭다. 이때부터 여행 계획을 세우는 거다. 투어라던가 가볼 만한 관광지라던가, 맛있을 것 같은 식당이나 빠르게 검색하고 빠르게 예약을 해치운다. 하나씩 정리되게 노트에 일정들을 채우기 시작한다. 오늘도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1시간 반동안 일일 투어를 예약하고, 식당 7개를 예약했다. 그 외에 가볼 만한 것들을 구글맵에 저장해 두었다. 비행기에서 예약한 일정들을 차례로 쭉 날짜별로 정리해 넣는다. 일정과 함께 동선을 체크한다. 그렇게 계획을 모두 마치고는 눈을 붙인다.



누군가와 함께 가는 여행이라던가, 정말 여행만이 목적이었다면 이보다는 더 일찍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차피 나는 혼자고. 이번 출국은 학회 참석이 1차 목적이고 그 외의 시간에 관광으로 즐기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내가 준비할 것은 여권+발표준비+지갑이면 충분했다. 딱히 다른 것에 큰 욕심을 두지 않았기에-이렇게 떠나는 당일에야 예약들을 진행하고, 예약을 못해도 크게 아쉬움이 없었다.


삶의 많은 것이 그러하다. 크게 욕심을 내지 않으면, 아쉬움도 크지 않다. 나는 점점 계획이 완전하지 않아도 넘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고, 계획을 유연하게 바꿀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듯하다. 어릴 적 빼곡한 계획 속에서 지켜지지 못해 느꼈던 많은 좌절감들이 이제는 딱히 느껴지지 않는다. 우선순위를 두고, 중요한 것만 제대로 해낸다면- 나머지 세세한 계획쯤이야, 내 상황에 맞추면 되는 거다. 이렇게 나는 전보다 조금 더 쉽게 세상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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