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버팀의 미학]
처음 동대표를 맡게 됐을 때, 나는 이곳이 언젠가 사람의 온기로 변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회의, 비슷한 다툼, 언제나 ‘불가하다’로 끝나던 대답.
그 긴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지금의 평온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실감하게 된다.
요즘 단지는 조용하다.
그런데 그 조용함이 불편하지 않다.
역할 공백의 조용함이 아닌, 일상이 매끄럽게 돌아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표회의는 방향을 제시하고, 부녀회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관리실은 실무를 지탱하며, 추진위원회는 미래를 그려간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보폭을 읽으며 걷는다.
특히 관리실은 처음으로 능동적인 파트너가 되었다. 거래처에 협찬을 요청하고, 행사에 필요한 장비를 마련하고, 자신들의 일을 ‘돕는 일’이라 말하지 않게 되었다.
행정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풍경이 달라졌다. 한때 버섯까지 피던 벤치는 새것처럼 손봐졌고, 잡초가 우거졌던 화단에는 모양을 갖춘 초록이 다시 자라났다.
현 관리소장은 세세한 부분을 직접 챙긴다. 배수로의 물길, 전기실의 조도, 눈에 띄지 않는 곳의 결함까지 빠짐없이 점검했다.
보고서도 달라졌다. 문제의 사후가 아니라, 과정의 기록이 되었다. 관리과장은 매 회의마다 명확한 보고를 남겼다. 수치와 비용, 작업 내역, 그리고 개선의 방향까지.
동대표들은 더 이상 질문이 많을 필요가 없었다. 그건 무관심이 아니라 신뢰였다. 굳이 요청하지 않아도 관리자의 손이 먼저 닿고, 보고까지 성실하니 여간 편리한 것이 아니었다.
경비와 미화원들의 변화는 더욱 분명했다. 이전엔 누가 봐도 피로와 무기력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인사 하나에도 힘이 있다. “수고하십니다”라는 말이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서로의 위치를 인정하는 표시가 되었다.
같은 업체, 같은 근로자를 데리고 180도 다른 아파트를 만들 수 있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그 경계 안에서 책임과 존중을 함께 세웠다.
이 당연한 일을 이제라도 누릴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조기분양추진위원들은 단지의 공용공간에서 주민 상담을 시작했다. 감정평가 문의, 분양가 계산, 절차 안내까지.. 누군가의 지시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찾아 움직이는 공동체 그 자체다.
그 덕분일까. 지금의 단지는 전국 리츠 단지들 사이에서도 손꼽히는 추진력을 가진 곳으로 알려졌다. 외부 단지의 위원들이 찾아와 “여긴 어떻게 이렇게 잘 돌아가냐”라고 묻는다. 대단한 비결은 없다. 진심과 단합, 그게 유일한 답이었다.
이제는 주민들도 변화를 체감한다. 카페에는 이런 글이 올라온다.
"관리실이 바뀌니 동네가 달라졌네요. 이제 진짜 사람 사는 아파트 같아요."
"봉사해 주시는 대표회의, 부녀회, 추진위 일동 여러분 늘 감사합니다."
이처럼 따뜻한 문구들은 우리의 원동력이 되어간다.
지금의 고요함은 오래된 소음이 가라앉은 자리다.
누군가의 권위로 눌러놓은 정적이 아니라, 스스로 지탱하는 평형이다.
회색의 콘크리트에서 이토록 푸릇하고 건강한 변화가 자랄 줄은 몰랐다.
우리가 피운 꽃은 봄의 일시적인 장식이 아니라 시간과 책임으로 쌓은 단단한 구조이다.
누가 주도했는가 보다도, 끝까지 지켜낸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나는 오늘도 이 단지를 걸으며 생각한다.
이 평온한 해 질 녘의 공기, 흙냄새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모든 것이 우리가 콘크리트 틈새에 피어낸 꽃의 향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