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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환천의 문학살롱 Sep 09. 2024

나이키 반팔티의 생애

현대일상문학시리즈


성큼 다가온 가을을 맞아 안 입는 옷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옷장 잠옷칸 맨 밑에서 마주한 나이키 반팔티.

한동안 엄청 친하게 지내다가 이유 없이 멀어진 친구를 만난 것처럼, 순간 반가움에 개켜진 옷을 펴보았다가 이내 미련 없이 헌 옷봉투에 넣어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왜인지 모르겠으나 토이스토리 속 앤디에게 버림받은 우디의 얼굴이 문뜩 떠올랐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친구와 함께했던 추억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 친구를 처음 만난 건 3년 전 봄 스타필드 나이키매장이었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최전방 마네킹삼형제
모두에게 입혀져 있을 정도로 갓 나온 신상에다가,
심플하면서 스포티한 디자인, 뻗쳐있는 나이키곡선의 진취적인 뾰족함, 기억은 안 나지만 저스트두잇 하겠다는 뜻을 품은 영어문장들..

이 모든 것들이 종합적으로 내 마음에 쏙 들어 입어보지도 않고 반팔티를 구매했다.

집으로 모셔 온 이 친구를 옷걸이 중에서도 제일 웅장한 놈으로다가 어깨선에 잘 맞춰 걸고, 이미 걸려있던 옷을 뒤쪽으로 바짝 밀어버린 뒤, 앞뒤간격을 넉넉히 두고 걸어 두었다.

그리 비싼 옷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기분을 내고 싶을 때 따문따문 아껴서 꺼내 입고, 입고 벗을 때 행여 목이라도 늘어날까 조심스레 머리를 밀어 넣으며 옷에 대한 애정을 듬뿍 쏟았다.

그러다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있던 날.
어김없이 나의 선택을 받아 함께 했고, 신나게 즐겼으며,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잠도 같이 자버리게 된다.

그렇게 그날의 흔적을 간직한 채 한껏 구겨지고, 양념이 튀고, 냄새가 배어 버린 나이키반팔티.

어쩔 수 없이 나의 손을 떠나 세탁기의 거센 소용돌이에 몸을 맡기게 되는데...

그때부터였지.
다른 세탁물과 함께 세탁기에서 뒹구는 녀석의 모습을 본 뒤부터 이상하리만큼 점점 나의 애정은 차갑게 식어갔다.

옷걸이에 각 맞춰 걸던 것도 의자 등받이에 걸어 버리고, 색깔 구별해 빨래통에 넣던 것도 아무 데나 넣어버리고, 목도 죽죽 잡아당겨 벗어 버리고..

결국 시간이 지나 새로 사들이는 다른 반팔티에게 메인 자리를 내어주며, 여느 반팔티와 마찬가지로 일상복이 되어 편의점, 고깃집, 식당, 애기등하원 등 멋 부리지 않아도 되는 일상을 함께하며, 우리는 반팔티와 사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사이가 되어갔다.

점점 외출 시 간택을 받는 횟수는 더 줄어들게 되고, 그렇게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었을 때, 그 녀석은 후드티나 라운드티 안에 받쳐 입는 이너웨어로 업종을 변경하게 된다.

꾸역꾸역 한해를 넘기고 다음 해 봄이 되었을 때.

봄맞이 다이어트를 시작하는 나는 그 친구를 헬스장에 입고 가기 시작한다. 땀을 흠뻑 흘려버려 몸에 붙은 티셔츠를 힘껏 당겨서 벗어 버린 뒤 빨래통에 던져 버리길 반복하다가..
결국 수건과 함께 건조기로 딸려 들어가 옷이 줄고, 모양이 무너져 외출금지 명령을 받게 된 후 잠옷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그렇게 잠옷으로 반팔티의 삶을 연명하다,
그런 식으로 떠밀려오는 다른 반팔티에게 잠옷의
자리마저 뺏긴 뒤에,

밀리고 밀려 옷장 속 잠옷칸의 제일 밑자리까지 밀려 어둠 속에서 나의 손길을 한없이 기다리는 반팔티가 되고만 것이다.

녀석은 오늘 결국 나를 떠나 헌 옷수거함으로 가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오늘 또 하나를 배운다.

우리 인생도 결국 반팔티와 같다는 것을..

하지만 그 친구 내 곁에서 끝까지 매 순간을
저스트두잇 하지 않았는가..

나 또한 누군가의, 어딘가의, 무언가의 반팔티라 하더라도 저스트두잇 하면 된다는 것.

너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지만
넌 나에게 멋진 나이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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